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cide Mio Aug 27. 2024

혁명의 시작을 알린 노래

주세 아폰수와 그란돌라, 구릿빛 마을

1974년 4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시간에 한 편의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포르투갈 전체에 퍼져나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aLWqy4e7ls


그란돌라, 구릿빛 마을 // 형제애의 땅 // 민중의 주권이 다스리는//형제애의 땅, 그란돌라, 구릿빛 마을 //  … 길 모퉁이마다 친구가 있고//그들의 얼굴에는 평등이 있다. 


발자국 소리를 시작으로 마치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부르듯, 반주 없이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울려 퍼진 이 노래는 밤늦게 듣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포르투갈 전역에서는 이 노래가 방송으로 나오길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포르투갈의 역사 특히 20세기 초반의 역사는 독재와 파시즘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1926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 정권은 "새로운 국가(Stato Novo)"라는 이름 하에 강력한 독재 정치로 포르투갈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군부 정권의 눈에 들어 경제 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안토니우 살라자르는 1935년부터 1968년까지 수 십 년간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포르투갈을 지배했는데 1970년 그의 사망 이후에도 이 전부터 내려오던 독재의 전통이 이어지면 점점 더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까지 포르투갈이 유지하고 있었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해외 식민지에서 독립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 전쟁에 투입되어야 했던 군인들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한 반대가 커지면서 급기야 장교들로 구성된 군대 내 조직이 쿠데타를 계획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이 쿠데타를 계획한 날이 바로 1974년 4월 25일이었는데 전국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신호로서 약속한 것이 25일 자정에서 한 시 사이에 라디오를 통해 방송될 “Grândola, Vila Morena(그란돌라 구릿빛 마을)"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가 방송이 된다면 쿠데타를 실행할 준비가 다 되었으니 참가하는 군부대는 각자 맡은 주요 지역을 장악하라는 신호였지요.


이 노래가 방송이 되고 시작된 쿠데타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정권을 무너뜨리게 되는데 거의 무혈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적은 사상자 만이 발생했고 장기간 독재에 지친 시민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때 시민들은 적극적인 환영의 표시로 쿠데타에 참가한 군인들의 총구와 탱크의 포구에 카네이션을 꽂았는데 이것 때문에 이 일은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알려지게 됩니다. 물론 그 혁명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1926년부터 시작되었던 독재가 끝을 맺고 포르투갈의 민주화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이렇게 혁명의 시작을 알린 노래를 부른 이가 주세 아푼소(Jose Alfonso, 1929-1987)라는 가수입니다. 그리고 그의 음악적 배경이 바로 앞의 글에서 소개해 드린 코임브라 파두였습니다.  


주세 아푼소는 코임브라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북쪽에 있는 아베로(Aveiro)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포르투갈령 식민지 여러 곳에서 일한 관리였습니다. 주세 아푼소는 건강 문제로 부모님의 임지마다 따라다니지는 못했고 친척들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1940년에 코임브라에 와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코임브라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했고 코임브라 대학에서 파두 음악을 연주하던 대학생 그룹과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음악 활동은 코임브라 대학에 진학해서도 이어졌고 50년대 초반에는 코임브라 파두 음악을 노래한 앨범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고등학교의 교사로서 일하면서 동시에 음악 활동을 같이 해 나갔다고 합니다.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고 교사로서 일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수로서 활동하던 주세 아푼소의 사진을 보면 음악인이라기보다는 두꺼운 안경을 쓴 학자에 가까운 분위기가 보입니다. 그는 60년 대 초반이 되면서 점점 더 힘을 얻어가던 반정부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계속해서 현실 참여적인 음악을 만들고 부르게 되었지요. 

이런 부분이 리스본 파두와 코임브라 파두가 크게 다른 점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살라자르 정권은 파두 음악을 의도적으로 지원하면서 그 음악으로 사람들의 정치적인 불만을 잠재우려 했습니다. 즉, 슬픔과 숙명에 대한 노래를 강조해서 보급함으로써 국민들이 체제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분위기를 만들려 했지요. 당연히 그런 수동적인 국민들은 정부의 독재를 받아들이고 그에 저항할 생각을 아예 하지 못 할 테니 말입니다.  


반면 코임브라 대학의 지적 전통 아래에서 성장한 코임브라 파두는 리스본 파두의 숙명적인 슬픔을 받아들이지 않고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음악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주세 아푼소 역시 그러한 분위기의 선두에 서 있던 사람이었지요. 한 가지 아이러니한 일은 몇 십년간 포르투갈을 지배한 독재 정권의 수장인 안토니우 살라자르 역시 코임브라 대학 출신이었고 그곳에서 경제학 교수를 역임하다가  군부 쿠데타 세력의 편에서 경제 장관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한 사회 안에서 가지는 책임과 역할이라는 부분에서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 줍니다. 


1964년에 주세 아푼소는 리스본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인 그란돌라의 노동자 단체가 주최한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행사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행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노래, “Grândola, Vila Morena(그란돌라 구릿빛 마을)"을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런데 이 노래는 파두가 아니라 또 다른 포르투갈 전통 음악 전통으로 포르투갈 남동부의 알렌테주(Alentejo) 지역에서 많이 불렸던 칸테 알렌테자노(알렌테주의 노래, Cante Alentejano)의 양식을 따른 노래입니다. 그란돌라라는 도시 역시 이 알렌테주 지역에 속한 도시였으니 그 양식으로 노래를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두만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칸테 알렌테자노는 2014년에 파두와 함께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이 음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구자에 따라서는 로마 시대 혹은 그 이전 시기까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파두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진 음악인 듯합니다. 


알렌테주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 사이에서 노동요처럼 불렸던 만큼 이 음악에는 그들이 살고 일하고 있는 땅과 농부들의 힘든 삶과 노동, 가족과 사랑, 그리고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살라자르 정권 아래에서 파두처럼 이 음악 역시 정권의 권력 유지에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농부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단함을 노래하는 이 음악이 결코 정부의 도구로만은 이용될 수 없었겠지요. 


칸테 알렌테자노 음악의 특징은 악기가 없이 사람들의 목소리만으로 노래하는 이른바 아카펠라 음악이라 할 수 있는데요. 한 사람이 노래를 시작하면 그것에 이어받아 두 번째 가수가 좀 더 높은 음정에서 더 많은 장식을 붙여 같은 멜로디를 노래하고 그 두 사람의 목소리는 여러 사람의 합창으로 이어집니다. 주세 아푼소의 그란돌라 역시 전형적인 칸테 알렌테자노의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동지애와 평등한 세상에 대해 노래하는데 포르투갈 기타 반주로 한, 두 사람이 노래하는 파두 음악보다는 이처럼 여러 사람의 합창이 더 효과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칸테 알렌테자노는 이 음악을 전문적으로 부르는 가수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지역의 농부와 노동자 등 일반인들이 모여서 부르는 노래로 전해지고 있어서 노래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아래의 동영상을 보시면 전형적인 칸테 알렌테자노의 형식으로 불려지는 이 노래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전문 음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합창을 통해 노래의 의미가 더 잘 전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l6yLTtX484

주세 아푼소가 1964년에 작사, 작곡했던 이 음악은 197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인 앨범 속에 실리게 되었는데 녹음 작업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 무렵 주세 아푼소는 반정부적인 음악 활동을 이유로 교직에서 해임이 되어 음악인으로서만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앨범으로 발표된 이 음악의 도입부에 실린 발자국 소리들을 녹음하기 위해 주세 아푼소와 여러 사람들이 스튜디오 인근의 계단에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에 가서 직접 걸으며 소리를 녹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앨범이 만들어지고 나서 이 음악을 공식적으로 처음 공연한 곳은 포르투갈이 아니라 스페인이었습니다. 반프랑코 집회가 열리고 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예, 잘 알려진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목적지인 그곳입니다.)에서 주세 아푼소는 1972년 5월에 처음 대중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1974년 3월 리스본의 한 극장에서 열린 포르투갈 음악 축제에서 여러 반정부적인 가수들과 함께 참가한 주세 아푼소는 그 행사의 마지막에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부에서는 주세 아푼소의 노래 중에서 여러 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는데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이 노래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지 않았고 그래서 행사의 마지막으로 주제 아푼소가 나와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 행사에  참가한 가수들은 물론이고 모든 청중들이 다 같이 이 노래를 합창했을 때 그 광경을 본 한 사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주세 알 아폰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를 때 모든 아티스트가 서로 팔짱을 끼고 몸을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고, 관객들도 함께 동참했다. …. “민중의 주권이 다스리는"이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관객들은 의도적으로 더 크게 가사를 외쳤다. 가수와 관객들에게 집중된 조명 효과 때문에 그 모습은 마치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 이 공연에는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던 군대 장교 조직의 몇 사람이 참석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들은 청중들 속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노래의 가사가 가진 의미 그리고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당당한 멜로디를 들으며 자신들이 준비하고 있는 쿠데타의 목적에 잘 맞는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주세 아폰수의 노래 중에는 이 보다 더 반정부적인 노래들이 있었지만 그 노래들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칫 라디오를 통해 방송하다가 정부의 경계심을 자극할까 걱정했던 이들은 요행히 금지되지 않은 이 노래를 신호로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혁명이 진행되면서 이 노래는 카네이션 혁명의 상징, 포르투갈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그리고 혁명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1974년의 공연은 아니지만 약 10년 후 1983년 같은 장소에서 열렸던 공연의 마지막에 주세 아푼소가 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공연장의 분위기를 보면 과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PzsJ0A8RIk

이처럼 포르투갈 역사에 큰 의미를 던진 노래였기에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둘세 폰텐스(Dulce Pontes) 같이 우리에게 알려진 가수와 그룹들이 있습니다. 몇십 년 전 노래라 가깝게 와닿지 않으실 분들을 위해 최근 스페인의 TV 시리즈인 "종이의 집(Casa de Papel)"에 삽입되었던 이 노래를 연결합니다. 얼마 전 소개해 드렸던 벨라 차오와 함께 이 시리즈에는 여러 편의 현실참여적인 노래들이 삽입되었던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mk5gUvgWh8


매거진의 이전글 파두, 코임브라, 포르투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