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그리고 평화 ②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by 김코알라

출장을 다니다 보면 참 재미있는 일을 많이 겪게 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취재하며 겪은 이런저런 경험들을 엮어보려 한다.


필자는 2018년 1월 20일 개최된 IOC '4자 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이보다 며칠 앞서 스위스 로잔으로 떠났다. 스위스까지의 길은 정말이지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하고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도착하는 노선이었는데, 여태껏 타 본 비행기라고는 일본이나 제주를 갈 때가 전부였기 때문에 20시간 가까운 여정은 그야말로 영원 같았다.


길고 긴 비행 끝에 현지시간 18일 오전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곧장 공항 관계자들을 취재하며 김일국 체육상 등 북측 인사의 도착 일정을 수소문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극비리에 움직이는 북한의 특성상 그들의 정확한 일정은 누구도 알지 못했으며 알아도 말할 수 없었다. 공항에는 이미 세계 각지의 언론 매체가 구름처럼 모여 있었고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정보를 공유하며 취재 태세를 고민하고 있었다. 비록 추측에 불과했지만 민간 항공기 추적 애플리케이션 '플라이트 레이더 24'를 이용해 북측 인사가 탑승한 항공편을 특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북측 인사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공항 내부를 구석구석 살피며 나름대로 가능한 동선을 그려보았다. 그러던 중 아주 우연히도 입국동 2층 깊숙한 곳에서 '프로토콜 게이트'를 발견했다. 프로토콜 게이트를 지나면 곧장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뒷 계단이 있었기에 카메라에 얼굴 내밀기를 극도로 꺼리는 북측 인사의 특성상 이곳이야말로 최적의 동선이 아닐까 생각했다. 애초에 북측 고위급 인사가 일반 출국 게이트를 통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였다.


오후 7시 30분경 북측 인사들이 탑승했다고 판단되는 항공편이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이에 앞서 프로토콜 게이트 안쪽에는 가슴에 붉은색 배지를 단 정장 차림의 남성 세 명이 포착됐고, 이들은 카운터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거나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등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습이 확인됐다. 의심의 여지없이 북측 관계자였으리라.

그 시각 1층 일반 도착 게이트 앞에는 국내 언론사는 물론이고 일본, 미국, 영국 등 전 세계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항공기의 착륙이 확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웅 IOC 위원이 모습을 드러냈고, 수많은 카메라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으며 기자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너 나 할 것 없이 질문을 던졌다. '내일 회담을 어떻게 전망하느냐', '어떤 부분을 주로 주장할 것이냐' 등 많은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를 따라 주차장으로 나오자 바깥에는 어느새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장웅 위원이 공항을 빠져나가자 기자들은 '오늘 할 일은 끝났다'라며 하나둘씩 철수하기 시작했다. 필자 또한 하루를 꼬박 지새운 비행에 더해 길고 긴 '뻗치기'를 끝내자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고 그저 어서 호텔에 들어가 몸을 누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현장은 모두 해산한 마당이었으나 '혹시나' 싶은 마음에 2층 프로토콜 게이트를 확인하러 갔다. 그런데 게이트 안에는 여전히 붉은색 배지를 단 남성들이 앉아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것은 필시 즉 김일국 체육상을 비롯한 북한의 고위급은 아직 공항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1층 일반 도착 게이트 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특파원에게 확인을 맡긴 뒤 필자는 프로토콜 게이트 옆에서 숨을 죽인 채 김일국 체육상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길 수십 분. 공항을 떠난 줄 알았던 장웅 위원이 다시 나타났다. 곧장 따라붙어 질문을 던지자 "어디에서 왔느냐?"라고 반문했고, 소속을 밝히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었다. 재차 내일 회담의 의제와 주요 쟁점을 묻자 "이미 다 공개가 됐고 보도에도 다 나왔지 않은가? 숨겨진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북측 관계자에게 김일국 체육상은 어디 있느냐, 아직 게이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며 그의 행방을 묻자 "지금은 바쁘다"라며 답변을 회피했고 계속되는 질문에 난색을 표했다. 함부로 입을 열 수 있는 위치의 인물이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북측 인사들이 타고 온 비행기가 착륙한 지 1시간이 훌쩍 지났을 무렵, 굳게 닫혀있던 프로토콜 게이트가 열리고 이윽고 김일국 체육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롱코트 차림에 단단한 얼굴. 그는 세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느긋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고 이미 짜인 동선에 따라 주차장에 마련된 검은색 차량에 올랐다. 시종 묵묵부답이었다. 뒤를 따르던 장웅 위원에게 '밖에 나갔다 다시 돌아온 이유'에 대해 묻자 "별 걸 다 묻는다!'라며 타박할 뿐이었다. 하루 종일 기다려 가까스로 마주한 북측 고위급 인사. 당시 김일국 체육상을 쫓던 현장에는 필자를 포함해 겨우 서너 개 언론사만이 남아있었을 뿐 모두 철수하고 없었다. 해외 출장 첫날부터 건져낸 값진 성과였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자 제네바 공항은 거짓말 처럼 조용해졌다. 드디어 집에 갈 시간이 됐다. 제네바 공항에서 숙소가 위치한 로잔까지는 전철로 1시간 거리. 그제야 처음으로 스위스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비에 젖은 스위스는 온통 검은색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무거운 몸을 호텔 침대에 내던지자 이내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살면서 앞으로 북한 사람을 마주할 일이 또 있을까?', '내가 북한 사람과 말을 해 본 적이 있던가?', '저들과 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왜 이렇게 거리감이 느껴지지?'... 비는 밤새 계속 내렸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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