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문제의 현주소
정치인들은 어디서 무엇하는가
필자는 강제동원 문제 취재를 위해 시민단체 관계자와 만날 때면 정부와의 소통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묻곤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특별할 게 없다", "전무하다"였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에 오랜 세월 투신해 온 시민단체 간부 K 씨는, 지난해 11월 박지원 국정원장과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 등 정부 여당 핵심 인사의 잇따른 방일 당시에도 "정부 측의 의견 청취는 없었고 다녀온 뒤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2020년 10월 21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서울외신기자클럽(SFCC)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이낙연 전남도지사를 지명했다. 이 지사는 과거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국회의원 시절에는 한일의원연맹 부회장을 지냈다는 점에서 정계의 대표적 '지일파(知日派)'로 불린다. 그런 이 지사를 국무총리로 지명했다는 것은 행정부를 통할하는 총리실을 중심으로 한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낙연 국무총리가 '역대 최장수' 기록을 세운 뒤 사의를 밝히기까지 한일 관계의 개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배상 판결이 나온 뒤 일본 정부는 노골적으로 보복 의지를 보였다. 개인과 기업 간의 소송에 국한하는 게 아닌 정치, 외교, 경제의 영역으로까지 사태를 확산시키려 했다. 이윽고 일본 정부는 '전략물자 수출 관리 엄격화 조치'를 발표했다. 무역분쟁의 시작이었다.
국내 여론은 들끓었다. 원래도 비호감이었던 일본이 보인 태도에 한국은 'NO재팬'으로 응수했다. 'NO재팬'을 주도한 진보 단체는 일본 기업 제품 목록을 공개하고 '국산 대체품'을 사용하자 독려했다. 불매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을 '친일파', '매국노'로 매도하는 등 몇몇 논란이 있었지만, 'NO재팬' 불매운동의 영향력은 거대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욱일기'를 찢고 일본 제품을 부수는 등 퍼포먼스가 연일 이어졌다.
「2019년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사용된 'NO재팬' 보이콧 재팬 로고」=인터넷 갈무리=
그렇다고 'NO재팬'에 정치권이 동참하는 게 말이 되는가?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정치인이라면 한일 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연마해온 정치력 외교력을 발휘했을 터이다. 그러나 일부 정치인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범여권 정치인들은 노골적으로 'NO재팬'의 파도에 편승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애썼다. '죽창가'를 부르짖고 '이순신 12척'이네 '거북선'이네 하며 '반일 감정'을 부추기기에 급급했다.
종국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한일 갈등은 총선에 긍정적이다"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무역분쟁, 외교 갈등 등 현안을 해결할 마음은커녕 당장 눈 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버린 듯했다. 한일 과거사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달라던 피해자들의 눈물이 이들에게는 그저 달콤한 정치적 재료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현실이 너무나도 참담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정치권이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치며 판을 뒤집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새롭고 날카로운 해법을 꺼내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2019년 말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대표 발의한 '기억 화해 미래재단 법안' 이른바 '문희상 안'을 돌이켜 보자. 더불어민주당 김진표, 김태년, 김성수 의원을 비롯해 여야당 13인이 공동발의로 이름을 올린 '문희상 안'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 반 만에 나온 한일 과거사 문제의 해법이었다. 문 의장은 법안을 발의하며 "한일 양국 관계가 미래를 지향하는 관계로 나아가도록 마중물의 역할을 하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문희상 안'은 일본 정부와 기업의 사죄 배상을 전제로 하지 않고 있으며, 재원 또한 한일 양국 정부 등의 '자발적 기부'로 마련한다는 점, 피해자가 재단의 위자료를 수령할 경우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아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해결책이었다.
과거 '2015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두고 '매국적 야합'이라 비판하며 "즉각 폐기"할 것을 요구해온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들고 나온 게 고작 이거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위 법안은 21대 국회에서 무소속 윤상현 의원에 의해 수정 없이 재발의 됐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여기에 공동발의로 이름을 올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이란 딱 그정도인 것이었다.
「2019년 11월 27일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문희상 안'의 즉각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법안 초안이 공개된 2019년 11월 말, 당시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을 지원하고 있던 민변,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겨레하나 등의 관계자들은 국회의장실을 방문해 '문희상 안'을 "즉각 폐기"하라며 항의했다. 강제동원 소송을 대리하는 임재성 변호사는 "이 법안은 가해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이 아닌 피해자를 청산하기 위한 법안이다"라고 맹비난했다. 후일 정의기억연대의 이사장이 된 이나영 중앙대 교수 또한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다"라며 "망국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문희상 안은 즉각 폐기함이 마땅하다"라고 강하게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한편으로 위와 같은 단체들의 맹비난을 받는 '문희상 안'을 오히려 찬성하고 적극 지지하는 입장도 있었다.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인해 법안이 자동 폐기 수순을 밟고 있던 2020년 4월 중순, 7~8개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의 단체장이 국회의장실을 방문해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했다.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가족 협동조합'의 이주성 위원장은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켜서 한일 관계를 풀자, 꼭 통과시켜달라고 피해자 대표단들이 합의를 봤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사자, 노무자, 원폭 피해자, 사할린 유족 등 '피해 당사자'들인 본인들은 적극 찬성하고 있는데 "돈을 벌어먹으려 X랄 하는 것들, 반미 활동이나 하던 X들"이 나서서 반대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문희상 법이 통과되면 돈벌이가 없어져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한민족이 공유하는 아픔을 두고 직간접적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목소리가 갈리는 마당에 어찌 한일 관계가 손쉽게 해결되겠는가. 1945년 광복으로부터 8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각자의 입장은 공고해졌고 각자의 주머니와 머리 위에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공통의 적이자 이 사태의 원흉인 일본 정부, 일본 기업은 잊은 채 서로의 멱살만 잡고 있다. 이것이 필자가 한일 관계를 취재하며 마주한 강제동원 문제의 현주소다.
일본의 뻔뻔한 태도에 굴복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높은 콧대를 콱 눌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반일' 논리에서 탈피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현재 세계 경제 10위권에 당당히 올라섰다. 막연한 '피해망상'과 '친일 몰이'에 몰두하기에는 국가적 위신이 너무나도 드높다. 경제, 문화, 군사, 보건 모든 부문에서 우수한 대한민국이 무엇이 아쉬워서 꼭 일본만 만나면 '숙적'이네 '대결과 극복'이네 감정에만 치우친 자세를 취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미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과 동등한 위치 혹은 그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있다. 그렇다면 그 위치에 걸맞게끔 이성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외교적 정치적 해법을 마련함이 바람직하다. 'NO재팬' 구호를 외치고 '죽창가'를 부르는 게 아니라, 국제사회가 공감할 수 있는 '정상적 수단'을 통해 교섭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정당한 요구에 일본이 응하지 않고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면 "뭐가 그렇게 겁이 나냐", "일본은 치졸한 나라다"라는 식으로 국제적 망신을 주면 그만이다.
판은 이미 다 깔려 있고 플레이어도 충분하다. 청와대에는 과거 강제동원 소송을 다뤄왔던 김미경 변호사가 균형인사비서관으로 있다. 법무부에는 강제동원 대리인 출신 이상갑 변호사가 인권국장으로 있다. 대한민국 대표 '지일파(知日派)'인 이낙연 의원은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일 간의 이해관계에 있어 그 누구보다 박식한 분들이 각자 한 자리씩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도통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최대의 의문이다. 능력의 부족이었나, 의지의 부족이었나?
문재인 정부는 지금에라도 각계각층의 시민단체와 긴밀히 소통하고, 이해득실에 따라 갈기갈기 나뉜 전체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단일화된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 그를 통해 일치단결되고 단단한 주장을 구성해야만이 일본과의 교섭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남은 1년여 임기 동안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의심은 확신이 될 뿐이다. 그 확신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정부 여당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소속사 및 특정 집단과 관계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