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탕면
그럴 때가 있다. 2시간 동안 애를 쓰며 A4 한 장을 겨우 완성했는데 이 글을 누가 읽어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다. 탁자에 앉아 글을 쓰다 거실로 햇살이 들이치고 밖의 나뭇가지는 바람에 실려 살랑살랑 움직일 때 나는 여기 앉아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하찮은 글을 써서 뭘 하나 하는 무력감이 들 때. 지금 기분이 그렇다. 순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책이 떠올랐다. 언젠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던 책 <문맹>. 자서전적인 이 소설에서 작가는 단호히 말한다.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 버리게 될 때조차.’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계속 써나가는 힘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끈질기고 성실하게 글을 쓰다보면 평범한 문장도 언젠가 빛나게 바뀔 수 있을까?
안성탕면 봉지를 바라보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튀는 구석이 없는 안성탕면. 안성탕면 스스로도 자신의 평범함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없었으면 오른쪽 상단 위 작은 동그라미 안에 ‘쫄깃한 면발’이라는 문구를 넣었을까? 동그라미 테두리 안에는 ‘쌀이 들어있어요’라고 적혀 있는데 고동색 글씨가 금색 바탕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라면을 담은 용기도 단아한 그릇이 아닌 그냥 양은냄비 통째로다. 건더기 스프도 없다. 자신을 애써 포장해 봤자 뭐가 나올 게 없다는 걸 안성탕면은 잘 알고 있다. 그저 자신은 한낱 라면에 불과하고 앞으로도 라면일 뿐이라는 걸 담담히 보여준다.
하지만 뜻밖에도 1983년 당시 1위를 달리던 삼양라면을 따라잡고 농심에게 1위의 영광을 안겨준 라면이 바로 안성탕면이다. 평범함의 승리. 현재는 분식집에서 주로 신라면이나 진라면을 사용하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가게에서 안성탕면을 끓여주곤 했다. 저렴함의 승리. 별 특색 없고 바탕화면 같은 라면이기에 오히려 여러 재료를 추가하여 먹기 좋은 라면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안성탕면 이름의 유래도 참 평범하다. 경기도 안성에 공장이 있기에 안성탕면으로 지었다는 것이다(표지에 ‘내 입에 안성맞춤’이라 적혀 있어 깜박 속을 뻔 했네).
안성탕면을 끓여본다. 혼자 먹어야 해서 반만 넣는다. 스프는 건더기가 함께 있는 일심 동체형이다. 플라스틱 포장지가 하나 줄어드는 거라 환경 보호에도 좋다. 다른 라면들도 스프랑 건더기 합쳐 하나로 만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부탁드립니다) 라면이 다 되었다. 호로록 한 입 먹어본다. 구수하고 라면다운 맛이 난다. 원재료명을 보니 구수한맛분말과 사골우거지베이스가 적혀있다. 구수한맛분말은 대체 뭘까? 나도 저런 분말 하나 갖고 싶다. 쌉싸름한 신선초에 드레싱으로 뿌리면 구수해지려나.
라면은 고도의 가공식품이다. 자연에서 생산된 밀을 거둬 가루를 만들고 반죽을 하여 뽑은 면에 여러 합성물을 섞어 기름에 한 번 튀기면 면발이 완성된다. 스프와 건더기에도 수십 가지 첨가물이 들어가 있다(원재료명을 보시라). 맛과 향과 색을 내는 첨가물, 방부제와 보존제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당연히 많이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 어디 라면 뿐인가? 빵, 과자, 피자, 탄산음료 등 따지자면 끝도 없다. 보통 몸에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외면하고 살기엔 너무 유혹적인 음식들이다. 나와 남편도 의지가 약하기에 암묵적인 규칙을 정해놓고 지키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과자는 주말에만 한 봉지 먹기. 라면은 하나만 끓이기. 탄산음료는 되도록 마시지 않기 등등. 어쩌다보니 건강차원에서 라면을 비판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라면의 가치가 줄어드는 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