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아들과 늙은 아버지가 한 집에 살고 있다. 어머니는 오래전 돌아가셨고 현재 아들은 시한부 판정을 받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어느 저녁 TV를 보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비디오 테이프를 틀어달라고 부탁한다. 생전에 아내가 좋아했던 영화를 보려는 거다. 아들은 평소처럼 테이프를 틀어주다 문득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가 한번 해보세요. 설명을 드릴게요. 테이프를 넣으시면 자동적으로 플레이 되거든요. 티비 전원 하고 단추를 티비 쪽으로 하신 다음에 채널 4를 맞추시면 되요.”
아들은 열심히 설명하지만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는 몇 번을 시도해도 서툴기만 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은 결국 속이 상해 방안을 뛰쳐나간다. 방안에 남겨진 아버지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본다. 잠시 후 아들은 책상에 앉아 비디오 보는 방법을 순서대로 종이에 적기 시작한다. 1번. 비디오 테잎을 넣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영화가 나온 시기는 1998년. 20세기에도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집안에 있는 가전제품이야 이것저것 눌러보면 된다지만 밖에서 마주치는 키오스크(무인 단말기)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 한잔이요’ 하면 주문이 끝날 일도 키오스크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우선 원하는 메뉴를 찾기 위해 목록과 사진을 하나씩 눌러봐야 한다. 간신히 아메리카노를 찾아 선택하면 이제부터 기계의 집중 공격이 시작된다. 먹고 갈 건지 가지고 갈 건지, 샷을 추가할 건지, 사이즈를 키울 건지, 더 주문할 건 없는지, 적립을 원하는지, 영수증이 필요한지, 꼬치꼬치 묻는 질문에 신중히 답해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신용카드 넣는 입구와 위치를 잘 찾아 조심스럽게 카드를 집어넣거나 옆으로 긁으면 주문번호와 영수증이 나온다.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이렇게 힘들고 피곤하다니, 안 먹고 말지.
신문에서 읽은 칼럼이 생각난다. 저자는 동네 식당을 방문했다가 주문 방식이 키오스크 기계로 바뀐 걸 보고 당황해 하는 노부부를 발견했다고 한다. 뒤에 서 있던 청년 한 명이 도와드릴까요? 했으나 부부는 괜찮다고 하시면서 조용히 나가셨다고. 작가는 그 모습을 관찰하며 디지털 기기가 노인을 소외시킬 수 있다고 적었다. 노부부는 키오스크 앞에서 간단한 음식주문조차 누군가의 도움 없이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에 자괴감이나 서글픔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한평생을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배우고 익히며 살아왔는데, 이만하면 불편 없이 살아가겠지 하는 순간 IT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에 내동댕이치듯 던져진 거다.
버스나 기차 예약도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면 집에서 편안하게 좋은 자리를 미리 고르거나 온라인 쿠폰으로 할인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할 수 없거나 신용카드나 휴대폰으로 결제 하는 방법을 모르면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직접 가서 하염없이 줄을 서야 한다. 정부는 디지털 서비스를 이용하기 힘든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키오스크 스크린 디자인 또한 각양각색이라 어르신이 하나의 단말기에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새로운 화면 크기나 버튼 모양을 마주하면 당황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화면 글씨가 어르신들 보기에 너무 작다. 고령층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표준화된 키오스크 디자인을 제공하면 매번 새로 익혀야 하는 어려움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변화하는 시대는 노인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무인 단말기는 관공서, 은행, 편의점, 호텔, 식당, 병원, 영화관 등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기에 끊임없이 배울 수밖에 없다. 노인 스스로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배우고 적응하려 노력해야 한다. 변화를 기피하고 포기할수록 일상의 불편은 고스란히 본인이 감당하게 된다.
100세 시대이니 우리 부모님도 살아갈 날이 30년이나 남았다. 불편을 참으며 살기에는 무척 긴 세월이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동네를 산책하다 무인 판매점이 보이면 무조건 들어간다. 엄마에게 키오스크 화면을 누르게 하고 사탕 하나라도 주문할 수 있도록 훈련? 시킨다. 옆에서 지켜보다 답답함을 참지 못해 대신 누를 때도 있지만. 즉석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에 들어가 함께 사진도 찍어본다.
“엄마 요즘은 이게 유행이래. 이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면 사진이 찍혀. 눌러봐. 자, 포즈 취하고.”
“세상에, 이렇게 쪼그맣게 사진이 나오네. 근데 이걸 어디에 쓰는데?”
키오스크 화면을 누르는 것도 무서워하던 엄마는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 중이다. 얼마 전 부모님 집 근처에 벤티 카페가 생겼다. 무인 단말기는 두 대. 엄마를 끌고 카페에 들어가 말했다.
“엄마,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싶어. 한 잔만 사줘. 포장으로 하고.”
엄마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들어 스크린을 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