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소기
결혼 전 혼자 살 때도, 결혼 후 같이 살 때도 청소기를 산 적이 없다.
청소기 소음이 거슬린다.
로봇 청소기는 조용하지만 비싸다.
선물로 들어오면 감사히 받겠다.
매일 밀대로 방 세 개, 거실 부엌을 청소한다. 딱 10분 걸린다.
집안에 먼지 한 줌 없다.
공기 청정기가 필요 없는 이유다.
청소기로 청소하는 것보다 5배는 더 깨끗해진다.
걸레를 손빨래하는 귀찮음은 감수해야 한다.
가습기도 없다.
겨울에는 안방에 젖은 수건을 걸어둔다.
최고의 가습기다.
2. 전자레인지
마찬가지로 자취할 때부터 써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데울 땐 오븐이나 찜기를 이용한다.
전자레인지가 없어 불편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동생 가족이 놀러와 밥을 했는데 현미라 소화를 못시킨다고 했다.
급히 편의점에서 햇반을 사왔다.
사용법을 보니 끓는 물에 15분을 삶아야 한다.
밥상은 다 차려놨는데 햇반을 데우느라 한참을 기다렸다.
그 뒤로 흰쌀을 구비해 놓는다.
전기밥솥도 없다.
저녁마다 압력밥솥으로 한 끼 먹을 분량의 밥만 한다.
3. TV
어릴 때부터 TV 프로그램엔 큰 관심이 없었다.
남편은 대학생 때까지 TV를 너무 많이 봤다며 보지 않는다.
둘 다 영화는 무척 좋아한다.
신혼 때는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다 이사 오면서 빔 프로젝터를 샀다.
주말마다 거실 벽이 스크린이 된다.
4. 욕실용품
린스, 바디클렌저, 폼 클렌저가 없다. 비누 하나로 다 해결한다.
스킨이나 썬크림도 바르지 않는다. 로션 하나면 된다. 겨울엔 로션과 바셀린을 섞는다.
반신욕을 할 때 입욕제로 구연산을 풀면 된다.
락스 대신 구연산으로 변기와 욕조를 청소한다.
5. 세탁세제
세탁기에 일반 세제 대신 과탄산소다를 넣는다.
섬유유연제 대신 구연산을 넣는다.
손빨래 할 옷들은 과탄산소다와 세탁비누를 함께 물에 풀어 사용한다.
얼룩도 잘 지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건조기도 없다. 아이가 둘이라면 생각해보겠다.
주방세제는 비상사태에만 쓴다.
평소에는 퐁퐁 대신 드립 커피 가루를 사용한다.
드립 커피를 내린 후 필터를 싱크대에 세워 둔다.
기름기 묻은 그릇에 뿌리면 된다.
기름기 많은 부분은 거름지로 먼저 닦아낸다.
결혼 후 13년 동안 쓰지 않은 물건들이다.
신혼 때는 에어컨도 없었고 자동차도 없었다.
일 년에 에어컨이 꼭 필요한 시기는 3주 정도.
몇 년은 견뎠지만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그 후 안방에 하나 달아 두었다.
자동차가 생긴 지는 3년 되었다.
다시 자동차 없이 살라고 하면 거부하겠다.
차라리 에어컨을 가져가라.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지지자는 아니다.
전자제품을 쓰지 않는 게 마음 편할 뿐이다.
물건이 없으면 관리할 필요가 없다.
일상용품도 마찬가지.
비누, 샴푸, 치약, 칫솔, 로션, 휴지를 정기적으로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크다.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우리 집엔 남들보다 많은 것도 있다.
식물이다.
베란다, 거실, 부엌 구석구석에 식물이 가득하다.
이건 다 남편 탓이다.
손가락 열 개가 다 초록색이라 죽어가던 식물도 살려낸다.
여기저기 나눠줘도 소용없다.
남편 손에 들어간 식물은 무한 번식해서 화분이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된다.
식물이 많으니 화분도 많고 흙도 많다.
삽, 물조리개, 씨앗, 퇴비, 화분받침, 영양제는 자동으로 딸려온다.
식물 등 아래에 있는 아이들은 무섭도록 잘 자란다.
나보다 더 오래 살 것 같다.
식물만 없다면
우리 집은 아름다운 미니멀 하우스가 되었을 거다.
식물이 있기에
우리 집은 악어떼가 나오는 정글 숲이 되어 버렸다.
집마다 자신만의 개성이 있다.
부엌 넓은 집, 마당 있는 집, 햇살 잘 드는 집, 천장 높은 집. 책 많은 집.
집주인마다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
각자의 생활 습관에 맞춰 바꾸고 채우며 산다.
집과 집주인은 서로를 닮아간다.
앞마당을 가꾸며 살고 싶은 마음을 초록 식물로 달랜다.
잔디 깎는 로봇이 마당을 돌아다니고 그 옆에서 꽃과 나무를 심는 날이 올 때까지 우리 집 화분은 무한 증식할 것이다.
하지만 식물의 상태는 늘 예측할 수 없고 어느 집에서나 식물은 피고 진다. 어떻게 식물을 잘 기를 수 있어요? 하고 물으면 많은 그린 핑거스들은 일단 많이 죽여봐야 해요, 라는 냉철하지만 어쩐지 섬뜩한 답을 내놓는다. <식물적 낙관> 김금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