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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책 들려주는 남자

by 유자와 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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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도서관 들렸다 산책가자.”

“도서관은 왜? 나 읽고 있는 책 있잖아.”

“주중에 다 읽으면 어쩌려고?”

“독서 휴식기가 필요해.”


주말마다 남편 손을 끌고 도서관에 간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고른다.

남편이 어떤 책을 고르든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책과 친해지는 게 우선이니까.


독서는 곧 공부라 생각하던 남편 마음이 바뀌는 데 10년 걸렸다.

책과 친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서로 마음을 트려면 10년은 더 있어야하다.


남편은 되도 않는 책을 고를 때가 있다.

입이 근질근질 하지만 꾹 참는다.

책을 읽으려는 촛불 같은 의지를 꺾으면 안 된다.

책 보는 눈은 스스로 길러야 한다.


남편은 모든 책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선택하기에 간혹 좋은 작품을 발견하기도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런 걸 꼭 봐야 되냐며 툴툴거리다 영화가 끝나면 감동할 때가 있다.

이렇게 재밌는 걸 평생 놓칠 뻔했네.

편견 없는 남편 덕분에 내 시야도 넓어진다.


남편은 민음사나 문학동네에서 나온 고전문학도 종종 읽는다.

유명한 책이니 읽어봐야 한다나.

얼마 전에는 <폭풍의 언덕>을 읽더니 주인공들이 모두 악인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남편은 책을 고를 때 몇 페이지까지 있는지 쪽수부터 확인한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한 시간 동안 자신이 읽을 수 있는 분량도 정확이 안다.


남편은 잠들기 전 30분에서 1시간 정도 책을 읽는다.

나는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며 묻는다.


“그래서 주인공 어떻게 됐어? 범인 찾았어?”

“아직 거기까지 못 읽었는데. 범인이 의심되는 인물과 만나긴 했어.”


남편은 지난 밤 읽은 분량만큼의 줄거리를 말해준다.

남편이 소설 한 권을 다 읽으면 나도 함께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주 동안 그 책 얘기만 듣다보면 그렇게 된다.


단점도 있다.

아직 못 읽은 책을 남편이 먼저 읽어버리면 그 책은 펼치기 싫어진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아. 난 이미 범인을 알고 있단다. 어서 죄를 고백하렴.


방금 남편은 듣도 보도 못한 소설 한 권을 빌려왔다.

어떤 내용을 들려줄지 기대된다.

막장이어도 괜찮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행복하면 좋겠다.

끝이 좋으면 다 좋으니까.



그리고 이건 자신 있게 드리는 말씀인데, 정신 차리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저절로 고전이 한 권, 두 권, 그것도 일생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될 작품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건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읽는 인간> 오에 겐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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