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어제까지 봄이었는데 오늘 아침 눈을 뜨니 여름이다. 아니 이렇게 급작스레 방문하다니, 예의도 없이. 허겁지겁 반팔을 찾아 입고 여름을 맞는다. 여름은 뻔뻔하게 온 방을 휘저으며 열기를 돋운다. 저기, 너무 일찍 오신 거 같은데 다음에 오면 안 될까요?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지만 여름은 들은 척 만 척. 여름 때문에 열이 오른다. 이럴 땐 뭘 먹어야 되나.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팔도 비빔면” (그래. 오징어 짬뽕이라고 했으면 한 대 맞았을 거야)
비빔면은 여름과 잘 어울린다. 비빔냉면, 비빔막국수, 비빔쫄면, 어느 면이든 꼬들꼬들 삶아 차가운 물에 씻은 후 새콤달콤한 소스에 비벼 먹으면 된다. 여기에 각종 채소를 푸짐하게 넣으면 훨씬 맛있겠지만 라면 프로젝트를 할 땐 순수하게 라면만 먹기로 했으니. 팔도 비빔면 봉지 뒷장을 보니 비빔면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는 재료 세 가지를 소개해 놓았다. 하지만 입이 짧아 못 먹는 음식이 많은 내겐 꽤 엽기적인 조합으로 보인다. 삼겹살 비빔면, 닭발 비빔면, 물회 비빔면이다. 이 조합이 맛있다고? 정말?
농심과 오뚜기 양대 산맥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인 팔도. 팔도비빔면은 저렴한 가격, 새콤달콤 소스, 가는 면발로 비빔면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나라도 앞서가고 있으니 다행이다. 브랜드 한두 개가 독점해버리면 재미없으니까. 자 그럼 끓여 볼까? 비빔면을 끓는 물에 넣고 3분 익힌다. 찬물에 면을 헹군 후 물기를 탈탈 뺀다. 첨가된 액상 스프를 넣고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로고송을 따라하며 비벼 본다. 음...오른손잡이라면 절대 왼손으로 비비면 안 된다. 사방팔방 빨간 비빔장이 다 튀어버린다. 저 노래 누가 만든 거니?
잘 비벼진 비빔면을 호로록 한 입 먹었는데 맵다. 라면 봉지 좌측 중앙에 싱그런 사과 하나가 그려져 있고 바로 그 아래 매콤, 새콤, 달콤 이라는 문구가 분명히 쓰여 있는데 새콤과 달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원래 이렇게 매콤했나? 순창 고추장이 9.63% 들어가서 그런 건가? 이 매운 걸 어떻게 먹으라고? 나처럼 매운 걸 잘 못 먹는 남편이 해결책을 제시한다.
“군만두랑 먹자.”
남편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냉동실에 있던 채식만두를 꺼내 굽기 시작한다. 그 사이 인터넷을 찾아보니 예전의 팔도 비빔면은 달달한 매운맛이었으나 2019년부터 입술과 혀가 얼얼해질 정도로 매워졌다고 한다(매운 거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군). 이럴 거면 새콤 달콤 문구는 빼주세요! 혼자 궁시렁 대는 사이 군만두가 다 구워졌다. 이번에는 군만두 한 입, 비빔면 한 입이다. 음. 한결 낫네.
우리는 통상 매운맛이라 말하지만 사실 매운 맛은 맛이 아니라 입안에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단맛, 신맛, 짠맛, 쓴맛은 미뢰로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맛이지만 매운 맛은 목구멍과 입안 전체의 자극을 주는 피부감각에 속한다. 통각이 잘 단련되었거나 통증을 덜 느끼는 사람은 매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픔에 민감하여 6학년 때 모두가 맞아야 하는 불 주사(옛날에는 그런 주사가 있었다)도 안 맞았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얼마나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던지 나 때문에 반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왜 사람들은 굳이 매운 음식을 먹으며 고통스러운 통증을 느끼려 하는 걸까? 매운 맛은 뇌에 통증으로 인식된다. 그러면 착하고 성실한 뇌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몸으로 진통 효과가 있는 엔돌핀을 분비한다고 한다. 엔돌핀은 통증을 줄일 뿐 아니라 기쁨까지 느끼게 하기에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매운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많이 웃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