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전봇대에 긁힌 자국 보이시죠? 김여사가 긁은 겁니다. 좁은 골목길 코너 돌 땐 항상 조심해야 되요. 초보 때는 웬만하면 큰 트럭 추월하지 마세요. 운전도 못하면서 여자가 추월한다고 기분 나빠하는 기사들이 간혹 있거든요.’ 운전 연수를 받으며 강사님이 틈틈이 해주신 말이다. 원래는 아빠나 남편에게 운전을 배우려 했다. 한적한 장소에서 몇 번 주차 연습을 하고 도로를 달려보면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거부당했다. 가족에게 배우다가는 의가 상할 수 있다나 어쨌다나.
연수 학원을 알아보니 5일 동안 2시간씩 강습을 받으면 바로 운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강습비는 차종에 따라 다르나 25만원~30만원 선이다. 그 중 한 학원을 정해 전화를 걸었다. 날짜는 언제든 상관없으니 여자 강사님으로 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채용된 강사가 남성밖에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강사 성별이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좁은 차 안에서 낯선 남자와 둘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강습을 받는 첫날, 아파트 주차장에 나타난 강사님 옷차림은 대략 댄디와 조폭을 결합한 느낌이었다. 강습이 끝나면 나이트클럽에서 약속이 있으신가? 순간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처음에는 경계심이 들었지만 성실하게 운전법을 알려주시고 예의를 지켜 주셔서 깔끔하게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강사님 말에 따르면 초보 여성 운전자를 노린 사기가 많다고 한다. 전문적으로 자동차 보험 사기를 치는 사기단이 있는데 길이 좁은 골목길이나 횡단보도에서 서행하는 차량의 사이드미러에 다가가 일부러 부딪힌다고 한다. 혹은 사기범이 도로에서 낡은 외제차를 타고 달리다 뒤 차량의 운전사가 여성이라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고의로 급브레이크를 밟아 부딪쳐 사고를 낸다고도 했다. 그러니 항상 앞차와의 간격은 넉넉하게 유지하고 위험해 보이는 좁은 골목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운전 연수를 하다보면 큰 차를 몰고 골목에 들어갔다가 차를 빼지 못해 쩔쩔매고 있거나, 전봇대에 차 옆구리가 긁혀 시발 시발 혼잣말을 하며 서 있는 김여사들을 가끔 본다고 했다. 그러니 운전에 익숙해 질 때까지는 조심 또 조심하라는 말씀.
‘김여사’는 운전도 잘 못하면서 차를 모는 여자라는 뜻으로 여성 운전자를 비하하는 말이다. 운전을 못하는 남자도 많을 텐데 뉴스에서는 항상 여자의 서툰 운전 행위만 화제가 되는 것 같다. 여자가 운전을 잘하면 ‘여자인데 운전을 잘한다’고 말한다. 남자는 당연히 운전을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디폴트(기본값) 되어 있다. 여자가 사고를 내면 여자라 운전을 못해 사고가 난거고 남자가 사고를 내면 실수로 사고가 난 거지 운전이 서툴러서가 아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운전을 못한다는 편견을 깨려면 나부터 정석대로 운전을 하고 차의 구조에 대해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에 대해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후 제일 처음 한 일은 대시보드와 운전대 주변에 적혀 있는 모든 용어를 천천히 살펴본 것이었다. RPM, ABS 같이 처음 본 단어들을 메모한 후 취급설명서를 펼쳐 어떤 뜻인지 찾아보았다.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보닛을 열어 엔진과 주요 부품을 찬찬히 구경하기도 하였다. 보닛은 자동차 앞쪽 덮개로 운전석 페달 위나 계기판 왼쪽을 보면 보닛을 여는 레버가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다. 버튼을 누르거나 당기면 잠금장치가 풀리며 보닛과 엔진룸 사이에 살짝 공간이 생긴다. 이때 손을 집어넣어 보닛의 고리를 당기거나 눌러 풀어주면 된다. 보닛을 열어 제치니 놀이터에서 놀던 몇몇 아이들이 자동차가 고장 났나 싶어 한참을 쳐다 보길래 전문가인척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거려 줬다. 지식은 중요하다. 차가 굴러가는 원리와 내 차의 기본 특징만 알고 있어도 운전할 때 자신감이 생긴다. 자신이 생기면 운전하는 게 훨씬 즐겁고 즐거운 마음으로 운전을 꾸준히 하다보면 조금씩 실력이 쌓인다.
많은 여성이 차를 몰고 가다 응급상황이 생기면 겁이 나고 당황하여 가까운 남성에게 전화부터 건다. 나도 그랬다. 운전 연수를 받은 지 4일째 되던 날 부모님 댁에 간다고 차를 끌고 나섰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 한복판에서 기름이 떨어져 차가 멈춰버렸을 때 보험회사가 아닌 남편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 후로 사고가 난 적은 없지만 앞으로는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충돌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상대방이 기선제압을 하려고 소리를 치거나 욕을 할지도 모른다. 이때 덩달아 화를 내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심장은 미친 듯 뛰겠지만 겉으로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응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경미한 사고라도 반드시 연락처를 주고받아야 한다. 상대방이 괜찮다고 해서 그냥 가버리면 나중에 뺑소니 범으로 신고당할 수도 있다.
여성 운전자로 사는 건 쉽지가 않다. 아직도 단지 여자가 운전한다는 이유로 무시를 하는 남자들이 있다. 도로 위에서 초보 운전자와 여자 운전자는 약자가 된다. 차 크기가 작을수록 무시당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삼종 세트를 완벽히 갖춰 버렸다. 경차를 타고 다니는 초보 여성 운전자. 그러니 도로 위에서 나쁜 운전자에게 위협을 받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한적한 상가 주차장에 주차를 할 때는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것이 조금 무섭고, 깜깜한 밤 차 한 대 없는 길을 혼자 운전하는 것도 무섭다. 뚜벅이로 살 때는 밤에 골목길을 걸을 때면 가끔 뒤를 돌아보곤 했는데 차를 운전해 보니 차 안에서도 완벽한 안전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성 운전자는 자동차 사고에서도 불리하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 따르면 ‘자동차가 “평균” 남성을 기준으로 제작된 충돌시험 인형을 사용하여 설계되어왔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를 당하면 중상을 입을 확률이 남자보다 47% 높고, 경상을 입을 확률은 71% 높다고 한다. 여자는 후면 추돌 시에도 위험한데 좌석이 여성을 목뼈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목과 상체에 근육이 적기 때문에 목뼈 손상을 입을 확률이 최대 3배이며 남성 편향적인 자동차 설계가 이 위험을 증폭’시킨다. 아직도 운전석에서는 남자 인형이 표준이고 그나마 여성 인형을 놓고 시험하는 자리는 조수석이라 하니 자동차 업계가 정신을 좀 차려야 되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이유 때문에 아직까지 운전을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아무튼 언니>에서 말한 것처럼 ‘남자친구나 남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차로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에 가보는 경험이 여성들에겐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 40살이 되기 전까지 남이 운전하는 차만 얻어 타다 직접 운전을 하여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신에게 커다란 ‘자유’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