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직 당신의 능력이 다하지 않았음에

조금 더 기운을 내면 어떨까요?

by flyingoreal

교육공동체라는 말속에는 교사, 유아, 학부모가 모두 들어 있다. 하지만 학부모를 대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학부모들의 요구와 기대, 감정이 유아들만큼이나 다양해서 때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유아들은 서툴러서 실수도 하고 잘못을 반복하기도 하지만, 금세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교사와 학부모는 이미 다 큰 어른이어서, 오히려 서로의 자존심이 부딪혀 갈등이 깊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는 유아를 가르치는 데 교사가 반드시 함께해야 할 중요한 존재다.


내가 초임교사였을 때는 유치원에서 부모교육을 위해 예산을 잡거나 외부 강사를 초대하는 일이 드물었다. 당시 유치원 취원율은 지금만큼 높지 않았고, 학부모들은 "아이 맡아줘서 고맙다"라고 말하며 생업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유치원은 초등학교의 돌봄 연장선처럼 여겨졌고, 아이들이 노는 걸 왜 굳이 ‘교육’이라고 부르는지 학부모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유치원 취원율 추이(2015-2024) (출처: 통계청 지표누리)
레지오 에밀리아, 100가지 언어를 통한 교육 ©챗GPT

그 즈음, 한국에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리아 교육’이 소개되었다. 아이들을 스스로 지식을 구성하는 주체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전쟁 후 사회를 재건하던 이탈리아의 부모들이 저녁 늦게까지 모여 ‘모든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함께 고민하며 토론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내게 파격적이고 놀랍게 다가왔다. 학부모와 교사가 함께 교육의 방향을 고민하고 소통하는 모습이 이상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내게 하나의 북극성처럼 보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치원운영위원회나 학부모회는 지금처럼 제도화되지 않았다. 그때는 교육을 교사에게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부모는 교육의 동반자라기보다는 학교 방침에 잘 협조하는 존재였다. 교사는 자신의 신념대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지만, 학부모들의 다양한 의견을 교육에 반영할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학부모들에게 유아교육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유치원 교사와 보모의 역할조차 명확히 구분되지 않던 시절이라, 초등학교 관리자들조차 유아교육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부모들에게 아이를 잘 기르는 일이 왜 중요한지, 내가 배운 방법을 마치 정답처럼 설명하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무모한 열정이었고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절박했고, 교육에 대한 신념과 용기가 자랑스럽게 기억된다.

나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그림책 읽는 방법, 인성교육 등을 주제로 꾸준히 강의를 했다. ‘행복충전 부모교육’ 카드를 만들어 세 번 이상 참석한 학부모에게 작은 선물도 드렸다. 아이도 없던 내가 유아교육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진심을 전하려 노력했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토요일을 이용해 주변의 병설유치원들과 함께 ‘행복충전 부모랑 아이랑’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유아들은 강강술래와 전래놀이를 하며 즐겁게 놀고, 부모들은 대학 강사의 ‘유아 그림책 교육’, ‘유아 음악교육’ 강의를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도 시킨 일이 아니었지만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마음을 모았기에 가능했던 행사였다. 그때의 나도, 함께한 선생님들도 정말 대단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교사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협력자로서 부모와 교사, 선택일 수 없어 ©챗GPT

워크샵을 열어 학부모들에게 그림책 읽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촬영한 후에 함께 보며 이야기을 나누었다. 그림책을 편안하게 읽어주지만, 무심코 습관처럼 읽거나 일방적으로 지도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자는 의도였다. 아이의 생각을 충분히 듣지 못하거나, 책 내용에만 집중해 즐거움이 사라지지는 않는지, 이야기 흐름을 방해하는 질문을 하거나 부모가 주도적으로만 말하지는 않는지, 부모와 아이의 대화를 함께 살펴보며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녹음 내용을 자동으로 문서화하는 기술도 없어서 녹음된 내용을 손으로 일일이 타이핑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자신과 아이를 돌아보고 관계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 뿌듯한 시간이었다.



교사가 교실 안에 갇혀서 아이만 바라보지 않기를, 시선을 공유하길



나는 교사가 교실 안에 갇혀서 아이만 바라보지 않기를 바랐다. 부모를 교육의 동반자로 초대해 함께 배우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공유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발하고 도전적이며 놀라운 존재라는 사실을 부모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다.



부모와의 만남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가르치는 유아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부모가 얼마나 고민하며 교사를 신뢰하는지를 깨닫는 귀한 시간이었다. 때로는 부모의 관심 부족이나 서툰 표현 때문에 유아에게 문제가 생길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부모와 유아를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부모교육 후 다시 만난 아이들의 얼굴에서 “선생님, 선생님”하며 존중과 신뢰를 보이던 부모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더 잘 키우고 싶은 부모의 진심과 고민이 느껴졌다. 결국 부모교육을 하며 내가 부모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들의 이야기에서 더 큰 힘을 얻고 있었다.


결국 부모들이 궁금한 것은 내 아이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


물론 요즘 부모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했고,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다. 가정마다 아이를 키우는 철학과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교사의 이야기가 특별히 신선하거나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유튜브나 책, 부모모임 등을 통해 손쉽게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강사의 이야기라도, 모든 아이에게 딱 들어맞는 정답을 주기는 어렵다. 결국 부모들이 궁금한 것은, 내 아이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교실에서 어떤 선생님이, 어떤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가르치는지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다. 나는 그 이야기를 교사 스스로 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새 나는 교사에서 원감이 되었다. 원감이 되어 보니, 학급이 아니라 전체 유치원의 관점에서 학부모를 대해야 했다. 교사 시절의 작고 따뜻한 이야기 대신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졌다. 담임교사가 아니라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야 할지도 막막했다.

가장 자부심이 넘치고 뭐든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돈키호테 같은 마음으로 가득했던 때는 대학 졸업 후 신규 발령을 받았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관리자의 자리에 오르고 나니 어느새 ‘조심’과 ‘염려’의 옷을 입고 여기저기 부딪히며 다듬어졌다. 유치원에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담임교사 시절과 달리 불특정 다수의 학부모를 상대하다 보니, 관계가 더욱 조심스럽고 어렵게 느껴졌다.


“아, 저러다 안전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유치원 방침을 따라주시면 좋겠는데, 저런 요구는 좀 과하신데.”
“학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좋을 텐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담임교사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더 막막했다. 나는 학부모 소모임을 만들어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학부모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내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보니, 부모로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기쁘면서도 순간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절실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학부모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고, 작은 도움이라도 건네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엄마를 위한 <그림책과 시와 그림이 있는 오후 클래스> ©canva


좋은 교육공동체는 평소의 이야기들로
조금씩 연결되어 단단한 근육처럼 형성되는 것



원감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학부모 모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안 해도 되는 일이다. 그전에 교사로서 학부모를 만나고, 교실의 이야기를 꾸준히 나누며 쌓아온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학부모와 만나는 일이 두렵지 않고, 이런 만남이 교사와 부모,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이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도 필요하다. 좋은 교육공동체는 필요할 때만 급히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이야기들로 조금씩 연결되어 단단한 근육처럼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쉽지 않고 고민되는 부분이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고군분투하며 지내는 교사들에게, 부모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라는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교사들끼리 통하는 감성과 언어로 이야기하는 건 훨씬 쉽다. 부모와 대화하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하지만 교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부모에게 전하고, 부모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교육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기 초에 울던 아이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친구를 사귀며 성장하는 과정, 때로는 울고 상처받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배우고 씩씩해지는 그 이야기들이 부모에게 더 많이 전해져야 하지 않을까.


a6b68571-9c97-44c8-8bf6-b510a31eebf6.png 손 안의 작은 틈으로만 바라보고 있진 않나요? ©챗GPT


유치원에 등원하는 아이들 얼굴에는 하루의 기분과 상황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놀이터에 가겠다고 떼쓰다 할머니께 혼난 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옷 때문에 아침부터 얼굴이 찌푸려진 아이,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서 다리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아이, 엄마 등에 매미처럼 딱 붙어서 들어오는 아이, 문을 열자마자 “언제 엄마 와요?” 하며 시간을 묻는 아이, 친구와 경쟁하듯 신나게 달려오는 아이까지. 짧은 등원 시간에도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데, 교실 안에서 경험하는 아이들의 하루는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할까?


그래서 교사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세바시)처럼, 교사 한 사람이 긴 강의 대신 15분 정도라도 자기만의 색깔로 진솔하게 교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흘러가는 긴 말보다 진심을 담은 짧은 에피소드 하나가 더 오래 기억되듯, 교사 한 명 한 명의 진솔한 15분이 모여 하나의 의미 있는 강의를 만든다면 정말 멋진 일이 아닐까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렇지 않아요?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