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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요? 그렇죠?"

그건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미선 씨에게

by flyingoreal

미선 씨의 전 직장 상사 A는 질문만 하면 화를 냈다. 정확히 말하면 화와 짜증의 중간쯤 되는 감정이었다. 가족에게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텐데, 직장에서 A의 반응을 마주하면 미선 씨는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궁금한 것을 묻는 걸 좋아하던 그녀에게 A는, 어쩌면 인생 최대의 ‘임자’였다.


그녀가 “이건 지침에 맞지 않는데 바꿔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질문은 곧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A는 방어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한마디로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식이었다. 반백 년을 살아온 미선 씨는, 직장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A가 떠나고 B가 왔을 때, 미선 씨는 의외로 기쁘지 않았다.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을 견디면 A 같은 사람도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로 온 사람이 또다시 A처럼 감정적인 사람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화는 언제부터 감정이 아니라 권력이 되었을까? ©챗GPT



다행히 B는 달랐다. 적어도 자신의 감정만 앞세우는 사람은 아니었다. B의 말투는 부드럽고 차분했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말끝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죠?” 하고 물었다. 그 어투 덕분에 긴장이 풀린 미선 씨는 마치 얼음이 녹듯 마음속 이야기를 흘려보냈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런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미선 씨는 질문이란 상대의 생각을 묻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했다. 그러나 다르다는 사실은 종종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다. ‘같음’은 받아들여지지만, ‘다름’은 반복될수록 거리를 만든다.


어느 날, 미선 씨는 B의 의견에 반대하며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고, 그 순간 B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 뒤로 B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미선 씨가 아닌 다른 직원 C에게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미선 씨는 자신이 솔직하게 말했다가 또 실수했다며 자책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예전 A는 나보고 인간답게 살라고 했는데,
지금 이 정도면 양반이지.”



나는 생각한다. 우리 직장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바뀌어야 한다. 다른 의견을 어떻게 조율할지 물으면 사람들은 으레 '이해', '소통', '역지사지'를 말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선 한 발 물러서기도,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직급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고, 집단 안에는 힘의 균형이 작동한다. 시스템을 지키려는 사람과 새 질서를 만들려는 사람 사이엔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역지사지, 그 사람의 무게를 함께 느껴보는 일이다. ©챗GPT




우리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이상적으로 말하지만, 실제 현장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포기하며, 누군가는 “아무래도 괜찮아요”라며 평화주의자의 입장을 택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정이란 결국 드물다.


많은 리더들이 그 자리에 선 이유는 사람을 이끌 자질 때문이 아니다. 운이 좋았거나 성과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끈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단지 ‘결정할 기회’를 얻었을 뿐, 언제나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 직장에서 회의를 지켜보며 나도 느꼈다. 우리는 회의가 길면 비효율적이라 여긴다. 그러나 빠른 결정을 내리려면, 그전에 충분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 그 과정 없이 결론부터 서두르면, 결국 목소리 큰 사람이나 리더가 떠안게 된다. 나머지는 “시켜서 했을 뿐이에요”라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주도성은 사라지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땐 책임도 회피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의 리더들은 부담을 덜기 위해 모든 의견을 수렴하려 한다. 하지만 때로는 사소한 결정조차 오래 걸린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B가 “그렇지 않아요?”라고 미선 씨에게 물은 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던 이유가.


그 이야기를 모임에서 꺼냈을 때, 친구는 말했다. “그건 동조해 달라는 뜻이잖아. 곧이곧대로 말하면 어떡해. 우리도 결국 그 자리 갈 거잖아.” 나는 나중에 그 자리에 가도 그렇게 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 한없이 침울해졌다. 좋은 결정을 내리는 일, 사람을 이끄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역량이나 일회성 연수에만 맡겨진다면, 방향은 쉽게 흔들린다.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나누고,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했을지,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어떤 결정은 공개적인 논의가 필요하고, 어떤 상황은 조용한 신뢰 속에서 조율되어야 하며, 또 어떤 순간엔 책임을 지고 설득해야 한다. 그런 토론과 기록이 사적인 이야기로만 사라지는 게 아쉽다.


설사 분위기를 위해 간식을 사 먹이고, 사비를 털며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해도, 그게 정답은 아닐 것이다. 나는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 말은 문제를 정면으로 보지 않게 만들고, 리더십의 본질을 흐린다.


가끔, 문득, 미선 씨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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