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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그림책을 만든다고?

무모했지만 순진했던 우리의 첫 기록

by flyingoreal

두 해째, 지역 유치원 교사들과 함께 AI 기반 교육연구회를 운영하고 있다. 작년엔 디지털 기술과 AI 도구를 교육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실험해 보는 데 집중했다. 올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결과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1년 전만 해도, 챗GPT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미드저니(Midjourney)나 프리픽(Freepik) 같은 이미지 생성 도구들도 지금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손가락 수조차 맞지 않는 캐릭터들이 종종 나왔고, 원하는 이미지를 얻으려면 수십 번은 반복해서 돌려봐야 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미지 생성 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AI로도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물론 시중엔 이미 ‘AI 동화책’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들이 꽤 많다. 하지만 유아교육 현장에서 그림책을 오랫동안 읽어준 교사의 눈엔 아쉬움이 남는다. 유아에게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먼저 말을 거는 건 '그림'이다. 유아들은 글을 읽기보다 그림을 보고 내용을 유추하고,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으며, 배경 속 단서를 찾아서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한다.

그림책 늑대.PNG 유아들은 글보다 그림으로 먼저 읽는다. ©챗GPT

예쁜 AI 이미지 위에 이야기를 얹은 책들은 겉보기엔 그림책 같지만, 그림과 이야기의 연결이 느슨하다. 마치 파워포인트에 등장인물과 상황만 띄워 넣고, 교사가 이야기를 덧붙이며 공백을 메우는 것과 비슷했다. 진짜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한 몸처럼 엮여 독자의 상상을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아무나 그림책을 만들 수 없는 이유다.

요즘 AI 이미지는 단순한 삽화를 넘어선다. 유아의 시선을 붙잡고, 독자의 감정까지 짚어내며 장면을 완성하는 ‘그림 텍스트’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 이 시점에 AI로 그림책을 만들기로 한 걸까. 하루 만에 이야기 하나쯤은 뚝딱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이 낯설고 더딘 작업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림책은 뭐 하러 쓰려고?


AI는 수많은 이야기 패턴을 학습했고, 누구나 아는 전형적인 줄거리는 잘 만들어낸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건 익숙한 구조가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 작은 이야기였다. 그 구체성은 결국 가까운 삶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곧 '지역'의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자란다. 그리고 대부분,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난다. 고향을 ‘지킨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도시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다 지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이들이 과연 자신이 자란 동네, 자주 걷던 골목 하나를 기억할까? 학원과 책상 사이에서 흘려보낸 시간 속에, 지역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네가 자라는 이곳엔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이 아름다운 장소가 바로 네가 살아가는 곳이야.


그림책 한 권에 담고 싶었던 건, 바로 그런 메시지였다. 언젠가 돌아가고 싶을 때, 힘든 시간을 지나고 싶을 때, 스스로를 붙잡아줄 장소와 이야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아들에게도 그 감각은 필요하다. 우리가 올해 만든 그림책은 그렇게 ‘지역’에서 출발했다.


모든 건 설렘에서 시작됐다. 아이디어를 나누고 함께하자고 했을 때, 교사들은 기꺼이 손을 들었다. 교육청 장학사님의 응원도 있었고, 종이책 제작을 위한 지원도 더해졌다. 하지만 곧 생각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이건 챗GPT에게 똑똑한 결과물을 빠르게 얻는 일이 아니었다. 과정마다 예상치 못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처음의 에너지는 서서히 소진되어 갔다. 샘 올트만이 “GPU가 녹아내린다”고 말했을 때는 웃으며 넘겼지만, 그 순간만큼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처럼 다가왔다.



노트북 앞, 긴 작업에 몸이 굳어버린 순간 ©챗GPT

그림책은 마음먹는다고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커리큘럼을 만들고 일정을 조율하고, 필요한 지원을 설계해야 했다. 우리는 교육청 직무연수로 연구회 활동을 전환했고, 그 덕분에 더 많은 연결이 가능해졌다. 초등 교과서 집필진, 그림책 작가, 디지털 강사들과 연계해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 챗GPT, 드리미나(Dreamina), 캔바(Canva) 같은 도구들도 익숙해졌다. 특히 교사들은 코로나 이후 캔 바에 익숙했기에, 캔바 그 자체보다는 AI 도구와의 연계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집중했다.

출판사 대표를 만나러 퇴근 후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상업 출판이 아니었기에, 편집부터 제본까지 모든 걸 스스로 익혀야 했다. 지역문화원을 찾고, 동네 이야기들을 발굴하며 재료를 하나하나 쌓아갔다. 그렇게 말로 그림을 그리는 낯선 작업은 조금씩 현실이 되어갔다.


10월 출간 목표로 제작 중인 그림책 일부

다음 날 유아들을 가르쳐야 할 교사들이 밤늦게까지 팀별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줌 회의를 열었다. 챗GPT로 그림을 만들고, 캔바로 편집하고, 다시 피드백을 주고받는 일이 반복됐다.

그림책은 이야기만으로 되지 않는다. 장면마다 개연성과 교육적 가치도 담겨야 하기에, 의견을 나누고 다듬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챗GPT로 원하는 이미지가 나오지 않을 땐, 캔바에서 다시 편집하며 그림을 다듬었다. 원하는 장면에 가까워졌을 때야 비로소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넉 달이 흘렀고,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아 그림책 작업을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연구회 들어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사서 고생하는 재주. 일 그만 벌리자

그날도 늦은 밤이었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나 자신이 기계와 물아일체가 된 듯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때 문득, “연구회 들어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라며 웃던 새내기 회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의 기대와 모험심이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어느새 ‘완성’이라는 목표에만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닌지,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평소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편이지만, 예기치 않은 난관을 만날 때면 “괜히 아이디어를 내서 몸만 고생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도 지쳐 있었다. 다른 연구회원들은 괜찮을까 싶어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좋은 기운도 있었다. 편집 작업 자체를 진심으로 즐기는 회원도 있었고, 두 명씩 팀을 이뤄 지역의 이야기를 개성 있게 담아내며 그림책을 완성해 가는 팀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막막하다던 이들이 점점 완성도를 갖추며 기뻐했다. 모두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이야기를 직접 찾아내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의미와 뿌듯함을 함께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독자의 눈은 예리하다.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내내 들었던 질문이 하나 있다. ‘우리가 지은 이 이야기를 정말 아이들이 좋아해 줄까?’


완성본은 아니었지만, 출력한 작업물을 유아들에게 읽어주면서 그 물음에 조금씩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이야기의 어떤 부분에 흥미를 가지는지, 우리 지역에 대해 어떤 관심을 보이는지를 직접 듣는 건 매우 의미심장했다.
“파도가 꼭 아빠 같아요.” 하며 등장 캐릭터의 행동에서 부모를 떠올리기도 하고, 초반에 등장했다가 후반에 나오지 않는 순이네 할아버지를 찾으며 “그 할아버지 어디 갔어요?” 하고 물어보는 유아도 있었다. 어린 독자의 눈은 예리하다. 보이지 않는 돌 틈에서도 꽃을 찾아내는 아이들 아닌가.


그림책을 들려준 뒤, 유아들이 던지는 질문을 듣고 “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고 수정해 나가는 일은, 단순한 책임감을 넘어 이 작업에 대한 자긍심으로 이어졌었다. 유아들의 피드백은 자연스러웠다.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료 교사끼리 서로의 작업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주고받는 일은 달랐다. 지적처럼 보이지 않을까, 감정을 상하게 하진 않을까, 괜히 서먹해지진 않을까—그런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이 책은 결국 세상에 나갈 것이다. 낯선 사람들의 평가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 아닐까.



우리의 그림책 여정을 브런치 글 한 편에 다 담아낼 수는 없다. 기획과 연수, 갈등과 조율, 반복된 회의와 수정의 시간. 책 간 권으로만 남겨지기엔 너무 많은 것이 녹아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만든 건, 단지 그림책이 아니다. 질문이다. 이 기술을 어떻게 써야 할까? 어디까지가 적절할까?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함께해야 할까? 아마도 책을 완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질 준비가 될 것 같다.

가끔은 버겁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렇게 고된 시간이 지난 후에 진짜 '달콤온다는 것을 안다. AI 그림책을 만드는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기회엔 그 우여곡절의 에피소드 조금 더 꺼내 보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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