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들
어느새 머리를 기른지도 2년이 지났다. 그렇다고 그전에 짧은 머리도 아니긴 했지만 펌을 했던 2020년 9월을 기점으로 벌써 2년이다. 문득 나의 변천사를 기록해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소소하게 남긴 셀카를 꺼내보며 잠시 빠르게 지난 시간을 훑어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의 흐름은 그저 빠르게만 느껴진다. 엊그제 같았던 그 기억들이 벌써 2년 전이라니.
사람들이 간혹 왜 머리를 길렀냐고 물어본다. 처음에야 펌을 하고 싶었던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앞머리가 눈을 지르거나 얼굴에 닿으니 간지러웠던 탓에 반머리를 묶고 싶었다. 반머리가 가능해지니 돌돌 말아 올린 똥머리가 하고 싶어 졌고, 그렇게 머리는 자라고 또 자라 어느새 어깨보다 더 아래까지 내려왔다.
이만큼 머리를 길러보는 건 처음이라 소소하게 처음 겪어보는 것들이 있어 기록해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여성 분들에게는 그저 당연한 경험이었을지 모를 이 경험들이 나에게는 '이럴 수도 있구나'하는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1. 생각이 자유로워진다.
이전에 썼던 글 중에 <다르게 살고 싶다면 헤어스타일부터 바꿔라>라는 글이 있다. (궁금하다면 글 제목 링크 클릭!) 헤어숍 원장님과의 대화에서 얻었던 통찰을 기록했던 글에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머리를 기르고 났더니 어쩐지 사고가 더 유연 해지는 듯하다. 작은 변화조차 시도할 용기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큰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더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때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변화는 유연한 사고에서 출발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마음이 있어야 삶에도 변화를 줄 수 있는 법이다. 참 비상식적인 이야기 같지만 머리를 기르고 난 뒤 나는 과거보다 더 창의력이 생겨났다고 믿는다.
실제로 더 많은 글을 쓰고 있고,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으며, 나만의 새로운 서비스를 구상 중에 있다.
2. 나의 정체성을 재정의 하게 된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슬 때만 해도 '작가'라는 호칭은 너무나 어색했다. 당시에는 여전히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가 강했던 만큼 작가는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나 자신을 자신 있게 작가라고 소개한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만큼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지만 이와 더불어 외형적인 변화도 한 몫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는 나를 처음 보는 누구도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사진작가냐고 추측하는 편인데 한 번은 건축가냐는 소리까지 들어봤다.
3. '나'라는 사람의 명확한 특징을 갖게 된다.
머리긴 남자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어깨 넘어까지 장발로 머리를 기른 남자는 생각보다 주변에서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거기에 아침저녁으로 아기를 등 하원 시키는 육아 아빠는 더더욱 잘 못 보는 것 같다. 아내에게 들은 얘기지만, 처음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을 무렵 같은 반 엄마들은 한 번 보고 나를 다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강렬한 나만의 이미지 메이킹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여기까지는 조금은 그럴싸해 보이는 의미를 부여해 봤다면, 이제부터는 보다 더 실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4. 집에 빠져있는 머리카락이 내 것인지 아내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 집에는 나, 아내, 그리고 22개월 아들, 이렇게 셋이 살고 있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보면 마치 딸아이가 한 명 더 있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5. 수챗구멍을 치울 일이 더 많아졌다.
머리를 한 번 감고 나면 시커멓게 수챗구멍을 가득 메워버린 머리카락을 보게 된다. 매번 치우는 건 솔직히 좀 귀찮은 일이긴 하다.
6. 머리를 감을 때 소요되는 시간이 확연하게 증가했다.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드라이를 하고 나면 팔이 아플 정도다. 처음에는 잘 말려서 나오려는 생각에 참 오래도 서서 드라이기를 흔들고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가며 정성을 다했었다. 이제는 그냥 대충 하고 나온다. 너무 힘들어서 자연 건조가 답이다.
드라이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프로세스도 늘어났다. 과거에 단정한 보통의 남자 머리스타일이었을 때는 '샴푸 - 드라이'가 끝이었다면 지금은 '샴푸 - 트리트먼트 - 헤어 에센스 - 드라이'로 끝난다. 머릿결이 중요하니 어쩔 수 없다.
7. 머리가 실타래처럼 엉켜버린다.
파마기가 남아서인지 아니면 반 곱슬이어서 그런지, 중간에 정말 풀리지 않을 만큼 엉켜버린 머리가 있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다. 손을 풀고 싶어서 만지작만지작하다 짜증 나서 잡아 뜯어도 보았다. 안 풀린다. 결국은 그냥 뭉탱이를 달고 산다.
8. 잠잘 때 고개를 돌리다 어깨 밑에 깔려있는 머리카락이 당겨 놀라서 깬 적이 있다.
하다 하다 정말 이럴 수도 있구나 했던 경험이었다. 전혀 상상도 못 해봤던 일인데, 아주 가끔이지만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9. 아이에게 머리채 잡히기 좋다. 가끔이지만 아이가 확 잡아챌 때가 있다. 진심 순간 아프고 화가 난다.
10. 헤어숍에서도 여성 헤어 비용으로 책정된다. 이제는 어깨 아래로 내려오니 비용이 추가된다.
11. 머리끈이 필수다. 가끔은 나에게 머리끈을 빌려가는 여성분도 있다.
12. 머리숱이 많으니 집게핀도 보통 힘이 있는 것이 아니면 금방 풀린다.
13. 과거에 입던 옷들이 조금 애매해진다.
14. 염색이나 펌, 커트를 안 한 지 오래되었더니 자칫 '도를 아십니까'의 비주얼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15. 거리에서 긴 머리 여성의 헤어스타일에 관심이 생긴다. 가끔은 윤기 나는 머릿결이 탐나기도 한다.
16. 머리가 억센 편이다 보니 머리끝이 옷을 뚫고 등을 지르는 일이 빈번하다. 특히 반팔티셔츠나 잠옷 입고 있을 때 그렇다.
17. 과거에는 머리를 매일 감았다면 이제는 귀찮으면 감지 않고 그냥 묶어 버린다. 이건 참 좋다.
18. 한 여름엔 정말 덥다. 반대로 찬 바람이 불면 보온력이 아주 좋다.
19. 음식 먹을 때 잘 묶어두거나 집게 핀으로 잡아두지 않으면 자칫 국에 담가 버릴 수 있다.
20. 어쩌다 보니 나의 캐릭터가 돼버렸다. 이제는 캐릭터 보존 차원에서라도 머리를 자를 생각이 없다. 다듬을 수는 있겠지만.
이 외에도 기억나지 않는 소소한 일들이 많이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고래는 바닷물이 짠 줄 모른다는 말처럼. 사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참 좋다. 다른 무엇보다 눈길을 끌 수 있는 나만의 포인트가 있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 좋은 장점이 된다.
며칠 전에는 시내에 나가는데 머리를 푼 채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 처음이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기에 항상 머리를 묶고 나갔었는데 그날은 머리를 감고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상태라 애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그냥 나갔다. 막상 나가보니 새삼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저 나만 주변을 의식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지레 신경 쓰고 살아왔나 싶었다. 어떤 옷을 입든, 또 어떤 꾸밈을 하든 사람들의 관심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그냥 '뭐지?' 하는 정도. 파파라치가 따라붙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망설였을까.
이처럼 변화는 괜스레 주변을 의식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주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의식하는 것도 의식에서 멀어지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 무엇을 하든지 굳이 남들을 신경 쓰지 말자. 해를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 눈치 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거다.
어차피 복잡 다양한 세상 속에 나의 소소한 변화는 그저 바닷물에 물 한 컵 쏟아부은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용기 내어 변화를 시도해보는 거다. 자고로 세상일은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