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삶이다.
화물차와 차 사고가 났다. 아니, 사고를 당했다. 다시, 엄밀히 말하자면 화물차 위에 적재되어있던 적재물이 떨어지면서 내 차의 뒷 범퍼를 때려 결국 범퍼가 깨져버리는 사고를 당했다. 장시간 운전의 몽롱함으로 그 순간은 무덤덤했지만 지나고 나니 정말 다행이었다. 내 소중한 가족들이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 그리고 이 사고에는 어느 누구 하나의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사실 만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는 하루였다. '무사히 잘 도착했다'는 말이 이렇게 값진 말이었음을 새삼 느낀 하루였다.
살다 보면 이미 일어난 사건을 돌아보며 '만약'이라는 조건을 더해, 다른 선택지와 이에 따른 다른 결과를 상상하게 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아내와, 아이,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순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당한 사고. 필요한 조치를 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 들었던 생각은 '만약 경부고속도로에서 평택-제천 고속도로를 타지 않았더라면'이었다. 거기가 첫 번째 갈림길이 되었다.
운전을 하다 보면 주로는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루트를 따라가지만 더러는 몇 가지 선택지 앞에 고민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두 가지 경로를 알려주는데 시간 차이는 10분 남짓일 때.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임과 고민의 시간을 잠시 동안 갖게 된다. 이럴 때 보통은 차선이 많은 넓은 길 또는 단순한 루트를 택하는 편이긴 하다. 즉, 평소 같음 굳이 루트 변경을 안 했을 거란 소리다.
그러나 가끔은 막바지에 생각을 바꾸게 될 때가 있다. 하필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사실 경부를 계속 타고 갔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휴게소를 가야 할 타이밍이었기 때문이었다. 출발해서 오는 내내 잠이 들었던 아이가 막 깨어난 참이었고, 순천에서 쉬지 않고 3시간 넘게 내리 달려온 참이라 몸도 뻐근했기에, 곧 휴게소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러나 그때 난 루트를 변경하는 선택을 했다. 휴게소가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평택-제천 고속도로로.
내내 휴게소가 나오지 않아 점점 애가 타들어갈 무렵, 전방 5KM 지점에 휴게소가 있다는 안내판을 보았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네비는 또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나를 세운다. 전방 2KM 지점에서 빠지라는 안내였다. 또다시 갈등을 한다. 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계산을 해본다. 아직 남아있는 주행 가능 거리와, 하이브리드 차량이니 전기 에너지로도 몇 키로 더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더해 결국 나는 또 방향을 틀기로 한다.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만약에 경부로 계속 갔더라면',
'만약에 급한 대로 평택 휴게소에 갔더라면',
'만약에 앞차와 조금만 더 붙었더라면.'
순간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감사했다.
정체구간의 서행 길에 난 사고였다는 점, 낙하물이 유리창으로 떨어졌다면 자칫 인명 피해로 연결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는 점, 화물차 운전기사가 좋은 분이어서 바로 보험 접수를 하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는 점, 아이가 많이 놀라지 않았다는 점, 등. 상황을 달리 보니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았음을 떠올려 보게 된다.
사실 '사고'라는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에도 생각을 달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다는 것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조금은 극단적 인지도 모르겠지만 매일 세상 어딘가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나에게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님에 감사하게 된다. 비록 이 일로 인해 파생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 또한 '귀가'라는 단어 앞에 더 이상 불편한 일이 되지 않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22개월 아가는 내내 이런 말을 한다.
"아빠 차, 아야."
"아빠 차, 아파."
"아빠 차, 고쳐."
"건전지."
귀여운 녀석 덕분에 다시 웃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가족이 그저 무사히 집에 돌아와 함께 누울 수 있음이 가장 행복하다.
내일은 '건전지' 갈러 공업사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