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16" 화면 안에 나를 기록한다.
'글문이 막힌다. 어떡하지?' '하루가 또 늘어지는 기분이다. 어떡하지?'
오늘도 역시나 어김없다. 피로감이 높아지면 찾아오는 우울감 수치 상승. 그럴 때면 '집'이라는 공간은 '편안함'에서 '갇혀있음'으로 재정의된다. 답답함이 증폭되니 무엇으로든 나의 시간이 방해받는 것이 싫다. 사실 오늘만 그런 건 아니고 언제나 피로도가 상승하면 찾아오는 현상이다. 그래서 별로 당황스럽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냥 감정적으로 불편할 뿐이다.
집에서 작업하기 시작한 뒤로 이런 상태를 더 자주 느낀다. 아무래도 완전한 집돌이 체질은 아니니 일정 거리를 이동하는 삶이 나에겐 더 활력을 높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직은 그만한 여력이 없기에 오늘도 답답한 마음을 그냥 눌러 버리고 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마음이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모든 것이 글이 되니, 어쨌든 쓰는 삶이 일상인 나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글은 써야 마음이 편하다.
'이제부터 마음과 생각을 다잡고 망부석이 되어 글을 써볼까'
오늘처럼 컨디션의 발란스가 전반적으로 흐트러지는 날엔 글문도 막히고 하루도 멍하니 지나가버리는 경향이 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보니, 그럴 땐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게 좋다. 오늘의 생각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다.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생각을 거듭해 봤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답변의 범위가 좁혀지는 듯하다. 마치 뱅글뱅글 달팽이 집을 그리다 보면 점점 가운데 한 지점으로 향해가듯, 글 쓰는 이유에 대한 생각 정리를 반복할수록 그 가운데 지점으로 가게 되는 기분이다.
나는 생산자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창조적 생산자. 달리 말하면 크리에이터. 맥북을 켜고 16" 화면을 바라보며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좋다. 화면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골몰한 시간을 좋아한다. 풀리지 않을 때야 미치도록 답답하지만 실마리를 잡고 하나씩 풀어낼 때의 희열은 충분히 생산자의 삶에 빠져들게 만든다.
'글'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익숙한 창조적 도구이고 이제는 '나'라는 존재를 가장 잘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익숙한 창조적 도구로 나를 비추는 행위를 의미한다. 거울에 비추지 않고는 나를 볼 수 없듯이 글을 통하지 않고는 나의 내면을 바라볼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정리하자면 나에게 글쓰기는 닫힌 나의 내면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를 '오늘의 나'를 만나는 행동이다.
글쓰기는 어쩌면 가장 난해한 도전인 듯도 하다. 쓰지 않으면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공백을 바라보고 있자면 생각도 마음도 텅 비어 버리는 듯하다. 문장의 길이에 따라 문단의 모양이 달라진다. 길고 짧은 덩어리들이 모습을 더해 갈수록 이 도전을 잘 해내고 있다는 안도가 생겨난다.
쓰면서 읽고, 읽으면서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시간. 단어 하나 조사 하나도 곱씹어 보는 시간. 어쩌다 이 행위에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문장에 정성을 들이는 만큼 나 자신에게도 정성을 쏟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마치 샤워를 하며 몸의 구석구석을 만져주듯 글쓰기는 생각부터 마음까지 내면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져주는 이 시간을 참 많이 좋아한다.
오랜만에 다시 쓰는 이유를 돌아봤다. 나는 나를 쓰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나를 기록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으면서 다르기에 나를 쓰는 것만큼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또 있나 싶다. 물론 한계도 있다. 담아낼 수 있는 언어의 한계.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한계. 분석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 재밌는 건 반복해서 글을 쓰다 보면 한계의 난이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를 마주할 수 있는 나의 레벨도 높아진다.
또 새로운 한 달의 글쓰기를 시작하는 오늘. 글문이 막혀 조금은 무거운 몸으로 스타트를 해보지만 역시 글문이 막힐 땐 글쓰기로 풀어내는 게 답이다. 이렇게 난 오늘도 글 한 편에 나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