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설명하고 싶은 욕망.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세계. 양자 간의 대립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를 통해 부조리를 부조리 상태로 둘 때,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나는 개인적으로 카뮈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그 삶의 의미를 발견했을 때, 아니 적어도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 때 자유함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 카뮈가 이야기하는 부조리 상태는 오히려 불안정함과 무의미로 다가온다. “삶의 의미가 있다고 시인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이라는 그의 문장에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울타리가 없는 나는 어떤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삶에 대한 의미 부여’는 오히려 인지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들어 낸다. 가령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카뮈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글 쓰는 사람’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놓는 순간 나의 삶은 그 속에 갇히게 되며 이로 인해 부조리가 사라진 세상으로 도피하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레임은 한편으로는 선택에 대한 효율과 나아갈 방향을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나에게 무한한 자유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볼 때, 무엇이라고 정의되지 않은 나는 오히려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의미 부여가 선행된다면 선택될 것과 포기될 것들이 명료해질 것이다. 그 순간 오히려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과학으로도 증명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하여 한 인간의 삶에 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게 자유를 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엔 오히려 지나친 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 언어로 담아낼 수 있는 것 까지가 결국 세계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상태. 그것은 오히려 한계 너머의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여긴다. 생과 사라는 유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삶이라는 흐름에서 한계 너머의 것까지 끌어와 삶을 의미 없음 상태로 두는 것은 오히려 생에 대한 무례함이지 않을까.
나는 카뮈가 이야기하는 부조리, 즉 명확함에 대한 열망과 철저한 무의미의 세계 간의 대립은 설령 삶의 의미를 시인하다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삶의 의미’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선다 해도 울타리 안에 또 다른 부조리는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하는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울타리가 존재함으로써 오히려 삶은 더 자유로와 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태는 자유가 아닌 방종이며 불안정함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