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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Jun 07. 2023

허기짐을 채우는 건 밥이 아니었다.

아날로그로 기록하는 디지털 세상의 틈새

새벽까지 작업을 했다. 어지간히 해야지 정말. 오늘 팟캐스트 녹음 당일인데 당일 새벽에야 대본을 쓰고 있는 나도 참. 5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고 일어나 나갈 채비를 마쳤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지하철을 타고 스튜디오로 출발. 지하철 안에서는 꼭 책을 펼친다. 희한하게 지하철은 책이 잘 읽히는 공간이다. 오늘도 저자의 문장을 곱씹으며 여백에 메모를 하고, 책의 한 귀퉁이를 접어가며 빠르게 달려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만의 느린 호흡을 즐겼다.


아침나절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짐이 밀려온다. 앞의 녹음이 끝나길 기다리며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는데 오히려 위를 자극했는지 배에선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난다. 미리 떠 놓은 물을 마시며 뱃속을 조금은 달래주었다. 1시간 남짓. 녹음이 다 끝나고 나서야 햄버거 하나 먹으며 속을 채워줬다. 


요즘 의도치 않게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그냥 군것질 거리를 줄이고 밤에 먹었던 맥주를 줄였을 뿐인데도 몇 달 전과 비교하면 3킬로가량 체중이 감량했다. 막상 몸이 가벼워지니 좋다. 그래서 이대로 조금만 더 빼 보는 걸로 마음을 먹었다.


속 든든하게 스튜디오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이상하게 허기짐이 가시질 않는다. 왤까? 순간 스치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나의 허기짐은 배고픔이 아닌 다른 것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즘 코즈모스 팀과 함께 매일 밤 자정 너머부터 새벽 3-4시까지 미팅을 한다. 적잖이 힘들고 피곤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을 계속하는 이유는 성장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오늘 하루, 나는 어제의 나 보다 업그레이드되어 가고 있나?라는 자기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는 날은 허기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니요'라고 답해야 하는 날에는 유난히 허기지다. 나의 허기짐을 채우는 건 밥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하루에 만족하고 싶다. 그래서 매일 불렛저널 다이어리에 하루를 기록하게 되었다.


불렛저널 다이어리는 손으로 하는 기록 시간을 나에게 허용해 준다. 아무런 프레임도 없는 백지 노트에다가 원하는 모양의 프레임을 그리는 것부터 시작된다. 현재 나는 월간 기록, 주간 기록, 일일 행복 기록, 취향 기록, 문장 수집 기록, 그리고 아이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멀티 플레이가 가능한 디지털 시대에 순도 100% 아날로그 기록을 하는 시간은 '잠시'라는 틈새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나의 허기짐을 채워주는 시간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화의 일선에 서있어 본 적이 없는 나이지만, 이제는 더욱 시대의 흐름에서 멀찍이 서있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 자동화, AI 시대, 우주여행 시대를 향해 빠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여전히 밭을 일구는 농부처럼 우직하게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간의 기록을 통해 알게 된 건 나는 빠름 속에 느리게 살아가는 삶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편리함 속에 불편함이 만들어내는 머무름의 시간이 주는 잠깐의 여유를 사랑한다. 오늘 읽은 책 속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만약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산이 있다면 당장 어떻게 살아갈 겁니까?' 이 질문에 난 이렇게 답하고 싶어졌다.


오늘 하루 허기짐을 채우며 느리게 살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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