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세월이 거듭되어야 할까? 적어도 대를 이어 계속되면 그 나름 전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집에는 명절 점심에는 칼국수를 먹는 전통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대부터 이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설과 추석 모두 어머니는 점심때마다 칼국수를 한 솥 끓이셨다. 채 썬 애호박과 양파, 그리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당근도 들어갔던 것 같다. 약간 걸쭉한 국물에 간장에 절인 다진 지고추를 넣고 후루룩 면을 빨아올리면 그 맛이 일품이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바지락 칼국수보다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는 칼국수가 더 맛있는 건 육수의 깊은 맛뿐만 아니라 사촌들이 모두 모여 함께 후루룩 빨아올리는 그 소리의 하모니 때문도 있는 것 같다. 가진 재료가 함께 푹 끓여져 육수에 깊은 맛을 더하듯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먹는 한 끼 식사는 함께라서 풍미가 더해진다. 온 가족들 중에 어머니의 칼국수를, 명절 점심의 칼국수를 가장 좋아하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버지이실 것이다.
아버지는 줄곧 형제간, 사촌지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자라면서 봐온 아버지 형제지간의 모습도 서로를 향한 배려와 우애 그 자체였다. 요즘 시대에는 사람의 삶이 점점 더 핵화되어간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이 되고, 핵가족에서 이젠 핵개인으로 넘어왔다. 가족 행사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시되니 점점 가족모임에 할애하는 시간이 지인들과의 만남보다 짧아지는 듯하다. 시대의 변화가 이해는 되면서도 한 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다. 나 역시 가족의 탄탄한 결속력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보니.
전통은 한 편으론 지켜져야만 하면서 동시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야 하는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근데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양면성이 아니라 결국 한 가지 결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지켜져야만 하는 건 그 본질이고 변해야 하는 건 본질을 유지해 가는 방법이니. 어떤 모습으로든 가족들이 모이는 것이 중요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본질적인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꼭 칼국수를 먹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 피자를 시켜 먹어도 그만이다. 그럼에도 칼국수가 아니면 어쩐지 좀 섭섭할 것 같긴 하다. 번거로움과 힘듦을 생각하면 당연히 외식이 편하고 배달음식이 합리적이지만 집에서 손수 차린 상에는 허기짐을 달래는 한 끼 식사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으니 말이다.
내 오랜 기억 속에도 돌아가신 두 분 조부모님과의 추억엔 언제나 음식이 곁들여져 있다. 할머니의 김치국밥과 창란무, 간장 양념장에 들어간 다진 파를 그렇게 맛있게 드셨던 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가자미 식해와 비빔냉면, 아무도 비빔냉면에 육수를 부어 먹지 않던 시절에 이미 육수 신공을 펼치신 외할아버지. 심지어 따뜻한 육수도 넣어 드셨던 기억들.
이런 나의 기억들을 거슬러 보면 명절 점심 칼국수의 전통은 더 오래 이어졌음 하는 바람이다. 적어도 내 아이가 자라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먹은 칼국수가, 그리고 함께 거실 바닥에 상을 펴고 둘러앉아 후후 불며 후루룩 먹었던 그 풍경이 남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