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그럴 수 없다.
요즘처럼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에 오프라인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엄밀히 말하자면 매우 비효율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만남이 아닌 그저 서로가 궁금해서 만나는 경우에는 더욱 시간할애에 따른 기회비용의 크기를 예측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참 부지런히 도 만남을 이어간다. 게다가 서울 권역이라면 대체로 내가 찾아가는 편이다. 만나는 시간 외에 오고 가는 시간까지 더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다음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다 쏟아붓는 셈이다.
‘나는 이걸 왜 이리도 꾸준히 하는 걸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 아닐까?’라는 질문에 오늘에야 가장 명확한 답을 적어낼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만남은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다. ‘나’는 내가 제일 모른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결국 글 속에 담긴 나를 보는 것과 같기에 어렴풋이나마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가장 좋은 건 나를 바라보는 여러 개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나의 걸음이 더디고 모자라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늘 나의 생각은 ‘뭘 더 해야 하나’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하나같이 이야기해 주는 게 있다. 비록 삶이 불안하고 갈등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나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알려진 누군가와 같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치를 쌓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 말을 듣는데 순간 멍했다. ‘왜 나는 나를 이렇게 바라봐 주지 못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더욱 나의 생각에 힘을 더하게 되었다. ‘역시 나는 내가 제일 모른다.’
삶은 누구에게나 시련을 선물해 준다. 시련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란 단어를 접붙인 건 지나면 정말 그 시간이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처음 만나 나누는 대화였지만, 퇴사 후 육아를 하는 아빠로서 지난 시간 겪었던 불안과 이를 통해 다져진 자기만의 토양에서 자신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와 나 모두 시련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삶을 나누는 동안 서로의 삶을 통해 자기만의 통찰을 얻는 시간. 바로 이것이 감히 전달할 수 없는 지혜임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삶이 허락하는 한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 가벼운 대화로 그치더라고 그 모든 시간은 나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다고 믿기에. 만약 인생에도 알고리즘이 존재한다면 다음은 또 누구와 연결되려나 기대해 본다. 알(레)고리즘을 통해 확장되는 나의 우주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