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면 두 가지 인상적인 모습이 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세상의 종말을 예견하듯 나라의 앞날을 훤히 내다보며 확신에 찬 말투로 점잖은 험담을 늘어놓는 경우가 한 가지고, 마치 천일야화가 시작되듯 지나온 삶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치며 자리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경우가 다른 한 가지다.
장인어른은 언제나 이야깃거리를 한 보따리 품고 다니시는 분이다. 가족 식사 자리에선 음식 이야기부터 소싯적 등산 이야기까지 참 다양한 이야기로 지루할 틈이 없다. 식사 후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선 유튜브로 즐겨보시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등장한 생태계 이야기를 한가득 풀어내신다. 오늘은 장인어른의 팔순 생신 식사 자리로 함께 모였다. 풍성한 식탁에 풍성한 이야기가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그러고 보니 내 아버지도 한 이야기하시는 분이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할 것 없이 다 방면을 두루 섭렵하고 계신다. 최근에는 트롯계를 빠삭하게 꿰고 계신다. 어쩌면 나보다 더 트렌디하실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70대, 장인어른은 80대. 두 분 모두 이야깃거리를 한가득 가지고 살아가신다. 문득 이야기가 남는 삶은 어떤 삶일까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인생 후반기엔 어떤 이야기가 남을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번엔 내 아이를 떠올려 본다. 이제 겨우 38개월. 두 어르신에게는 세월이라는 시간의 탑이 쌓여있다면 아이에게는 호기심이라는 랜덤 박스가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쌓여있다. 무엇을 열어도 다 신기하고 재밌다. 집에 돌아오면 신기하고 재미난 것들을 쫑알거리기 바쁘다.
두 가지 경우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보면 이야기가 남는 삶은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인 듯하다. 사소한 것부터 깊이를 더하는 것까지 호기심은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모든 호기심의 영역이 다 남는 건 아니겠지만 만 가지 중에 남는 것이 천 가지 중에 남는 것보다 많은 확률이 높은 건 자연스러운 이치 아니겠나. 호기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그만큼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는 뜻이다.
또 다른 요소는 경험의 낙차가 클수록 이야기로 남겨질 재료가 많다는 것이다. 경험의 낙차가 크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극과 극의 경험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가령 장인어른은 소위 말하는 해방둥이 세대이시고, 아버지는 전후 세대이시다. 극빈의 시대에서 문화 강국의 시대를 경험하신 세대로서 세월이 만들어낸 낙차만큼 풀어낼 이야기의 폭이 광대역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원래 다양한 '설(썰)'은 격동의 세월에 풍성해지는 법이다.
반면 38개월 아이의 삶에도 낙차가 존재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는 매일의 삶에 낙차가 생기는 듯하다. 아침이 되면 이제 일어나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현실부정으로 시작하여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TV를 보며 행복지수가 극에 달할 때 다시 자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절망감. 아이의 하루는 이렇듯 매일 격차가 존재한다.
누군가에겐 지나온 삶이고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삶이지만 삶은 받아들일 마음만 있다면 모두에게 '이야기'라는 풍요를 건넨다. 어쩌면 맹목적으로 어느 한 점을 찍어놓고 달려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삶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시간에도 나름의 이야기가 남지만, 그리고 그런 시간이 필요한 순간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게 아닌 선택되는 삶이라면 말이다.
비록 현실의 어려움은 존재하지만 3년 전 퇴사를 결정한 이유. 그리고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는 이유는 나와 내 아이, 내 아내,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삶에 다양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결국 시간이 지나 내 아이가 독립할지라도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건 이야기뿐이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오늘도 잠든 내 아이의 마음에 가족들과 함께 나눈 저녁식사 자리를 통해 또 한 자락의 이야기가 남았길, 그리고 그것이 행복한 이야기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