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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건네는 소리

by 알레

'오늘은 전부터 가보고 싶던 카페에 가볼까?' '흠, 거기에 가려면 또 한 지하철로 한 시간은 가야 하는데 그냥 동네 스벅에나 갈까?' 시계를 바라보고 마치 오래전 TV 프로그램인 인생극장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일단 뭘 좀 먹자. '라면을 먹을까? 아니면 밥?' '귀찮은데 그냥 라면 먹어?' '아냐. 그래도 건강한 한 끼가 중요한데, 밥을 먹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럴까?' '아아, 영 귀찮은데, 라면? 밥?' 또 한참을 보냈다. 이 빌어먹을 선택 장애. 순간 알아차렸다.


'아, 나 지금 피곤하구나.'


요즘 전보다 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를 위한 선택. 생각보다 나의 만족감을 높이기 위한 삶을 미뤄왔던 것 같다. 한 번 두 번, 경험해 보니 이런 상황에 이런 느낌이 지금 내 마음이 나에게 건네는 사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중 확실하게 깨달은 것 하나. 선택 장애와 우울감. 이 둘은 한 몸처럼 찾아온다. 이 둘에게 문을 열어주는 건 언제나 피로였다. 당장 모든 고민을 접고 20분 정도 침대에 누웠다.


살면서 느끼는 건 배려와 양보가 언제나 좋은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버(Giver)들은 테이커(Taker) 들에게 호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좋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 되려 나를 호구로 만들어 버리는 반복된 경험은 마음을 병들게까지 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최종 승자는 기버라고 하지만 이리 승냥이 같은 테이커들을 넘어서려면 단단해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이 건네는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이.


우리는 생각보다 자기 마음에 소홀하다. 사회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자기 마음은 뒷전이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번번이 마음과 다른 선택을 한다. 나보단 모두에게 이로운 절충안. 근데 그게 결국 나를 무너뜨리는 균열이 되는 줄도 모르고.


삶을 진작 이런 마음으로 살았더라면 현재의 난 조금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겪어보지 않았으니. 다만 적어도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주저함은 덜하지 않았을까.


넌지시 추측해 보건대 근래 글이 잘 쓰이지 않았던 이유 역시 피로감 때문이었을 것 같다. 비록 오늘 잠깐 누워있던 20분 동안 잠에 들기는커녕 오만 잡다한 생각의 소용돌이가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그 잠깐 덕분에 개운함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어쩐지 그 이유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의 선택은, 스벅이었고 밥이었다. 뭔가 뿌듯하다. 멀리 갔으면 오가는 길에 피로감이 더했을 거고, 귀찮다고 라면을 먹었으면 부대끼는 속사정에 기분이 내내 가라앉아 있었을 테니. 마음을 따른 덕분에 몰입하여 오늘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사실 요즈음에 마음에 적잖은 부담을 주는 일이 있다. 무조건 마음을 따르자니 그간 마음을 써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마음을 거스르자니 뒷감당에 대한 부담이 이어질 것 같고. 내내 마음을 따라야 한다고 글을 써놓고 마무리가 갑자기 '그렇다고 또 그게 그렇지만은 않아'라고 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근데 또 인생이 워낙 다각면체니까. 해답을 찾는 방법도 다채로울 수밖에.


이럴 땐, 아내에게 물어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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