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콸콸콸콸.' 아침부터 물이 쏟아져 내린다. '뭔 일이지? 아직도 옥상 저수조 청소가 안 끝났나?' 어제 하루 저수조 청소로 일시적 단수였는데, 오늘도 베란다 우수관으로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어째 심상치 않다. 어제의 경험상 오늘도 물이 곧 끊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보, 아무래도 얼른 씻는 게 좋을 것 같아."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경비 아저씨에게 여쭤 보니 오늘도 뭔 일이 일어나긴 했다. 이때까진 전혀 몰랐다. 우리가 난민 신세가 될 줄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내의 메시지를 받았다. "여보. 또 물 안 나와 ㅠㅠ." 아, 우려했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니 아파트 주차장 쪽에 하얀 물통들이 쌓여있었다. 불길한 마음에 용도를 물어보니, 화장실에서 사용할 물을 떠 가라는 것이었다. '아뿔싸!'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7개의 동이 있다. 우리 집은 105동. 난민 신세가 된 주민은 105동 주민들 뿐이었다.
하나 둘, 동네분들이 흰 말통을 카트에 싣고 경로당으로 간다. 경로당 쪽에 물호스를 연결해 뒀으니 물을 떠가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일단 집에 가방을 놓고 다시 나와 카트 대열에 합류했다. 경로당 앞에 갔더니 아파트에서 나눠준 물통뿐만 아니라 김치통에 대아까지, 가지고 나올 수 있는 통은 다 들고 나온 분도 계셨다. 아주머니들 대화를 건너 들으니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 보였다. '설마.'
내 차례가 되어 물을 가득 채우고 집으로 들어가다 아저씨에게 물어봤다. "혹시 이거 언제쯤 복구가 될까요?" "몰라요, 뭐 뭐 얘기 들어 보니까 한 3일은 걸린다는데요?" "3일이 나요?" 뜨악이다. '근처 어디 숙소라도 잡아야 하나?' '당장 아이는 어떻게 씻기지?'
아이 하원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오늘 당장 마감해야 할 일이 떠오른다. 하원 후 집에서 작업할 계획이었는데 집에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짜증이 올라왔다. '왜 하필 우리 동만 이러지?' 일단 집 근처 부모님 댁으로 피신해야겠다. 잠은 집에서 자더라도 저녁시간에 부모님 댁으로 가서 씻기라도 해야겠다 생각하며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생각지 못한 상황들에 계획이 모두 틀어져 버렸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하니 마음을 추스르며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자꾸 미간이 찌그러진다.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에 온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부디 오늘은 빨리 작업을 마치고 일찍 자고 싶었는데, 오늘도 영 틀린 것 같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럼에도 해야만 한다. 해야만 한다.'
계속 이 생각만을 되뇌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 본다.
살면서 종종 그런 말을 듣는다.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되더냐?'
어제오늘, 이틀간 겪고 있는 상황은 모든 계획을 통째로 뒤틀어 버렸다. 계획이 틀어지니 '욱-'하는 감정이 먼저 올라온다. 다행인 건 오래 지나지 않아 이성이 감정을 누르고 부랴 부랴 계획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삶은 우리를 매일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게 만든다. 마음은 언제나 가장 빠른 길을 택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비행기로 갈 수도 있고 걸어갈 수도 있는 게 인생이 던지는 예측 할 수 없는 변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주저앉아 하늘을 탓할 수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걸어서라도 가야 하는 게 맞다. 그러다 보면 또 비행기를 타는 순간이 오겠지 생각하며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려본다.
그나저나, 부디 내일이라도 복구가 되면 좋겠다. 제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