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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체험으로 배운 인생

by 알레

이틀 전에 브런치에 올린 난민 체험기가 이렇게 반응이 높을 줄은 몰랐다. 조회수가 10000이 넘다니. 그저 그날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날의 불편한 감정이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 글 속에 박제시켜 버린 건데. 불편한 상황을 겪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글쟁이로서는 큰 위로가 되었다.


난민 체험은 이제 하루 남았다. 어제오늘, 마실물도 아끼고 화장실은 더더욱 밖에서 이용하려 하다 보니 몸이 평소 보다 더 피곤하다. '이러다 배라도 아프면 어떡하지?'싶은 생각에 뭘 편히 먹지도 못했다. 사실 이 부분은 성격이 문제다. 그냥 먹고 화장실 가고 물이 모자라면 더 떠오면 그만인 것을. 물 뜨러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이 덥고 귀찮아 선택하지 않은 내 성격 탓이다.


물이 끊기기 전에 사용했던 컵이랑 그릇이 싱크대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역시 또 성격상 싱크대에 식기를 그냥 두는 걸 싫어해서 담아둔 물을 부어가며 설거지를 했다. 와우. 컵 3개와 그릇 2개, 티스푼 2개 닦는데 물을 이렇게 많이 써야 하는 줄 몰랐다. 페트병 한 통을 다 사용했다. 근데 그마저도 평소라면 물로 더 헹궜을 상태였다.


세수할 때는 또 어떤가. 집에서 사용하는 작은 양푼 그릇을 바가지 삼아 물을 받아 쓰는데, 적어도 두세 번은 물을 떠야 한다. 양치까지 하면 그 이상의 물이 소모된다. 용변을 본 뒤에 물을 내리기 위해 아이 모래놀이 장난감으로 가지고 있는 작은 양동이를 사용하는데, 역시 서너 번은 물을 부어야 흔적이 남지 않는다.


'내가 평소 이렇게 물을 많이 썼구나.'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익숙한 대로 사용했던 물이 막상 끊기고 나니 나의 습관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90년대였나, 그즈음 가정마다 물을 아끼자는 취지로 변기 뒤 수조에 벽돌 하나를 넣어 놓는 집이 많았다. 벽돌의 부피만큼 물을 절약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땐 뭐 하는 짓인가 싶었는데, 오늘따라 그때가 떠오른다. 거저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에 거침없이 사용했던 나를 돌아본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 나에겐 불편함 없이 주어진 자연의 모든 것들이 내 아이의 세대와 그 아래 세대에 이르면서 전혀 당연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린다면 어쩌지? 세기말 영화에서 꼭 나오는 것처럼 물도 공기도 땅조차도 마음 편히 누리지 못하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면 너무 암담할 것 같다는 생각.


솔직한 말로 나의 경험은 그저 푸념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정상화될 예정이고 그다음부터는 다시 이런 생각을 망각한 체 이전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번 경험은 꽤나 인상적으로 남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당연한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시간이었다. 편리에 기대어 살아왔던 인생이 얼마나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지도 깨달았다. 그렇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엄청 절약하며 살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는 살아야겠다.


오늘도 물을 길어왔다. 물을 긷는다고 표현하니 마치 우리 동네 어디 우물이라도 있는 것 같다. 물을 뜨는 곳에 가면 관리 아저씨 두 분이 계신다. 물지킴이이면서 어르신들이 물통을 들고 나오시면 도와주신다. 따지고 보면 당신네들도 어르신인데. 단수가 되니 참 여러 사람이 고생이다. 부디 내일 모든 게 복구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어쩌다 보니 캐리어 끌고 여행 다녀오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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