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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Jan 05. 2022

퇴사 후 맞이하는 새 해 아침

- 별개 다 행복하구나 싶다.

직장 생활 중에 어김없이 맞이하는 시간이 있다. 시무식. 한 해를 시작하는 그 출발을 알리는 하나의 의식 행위 같은 무언가를 하는데 언제나 '굳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퇴사 한지 두 달. 그리고 한 해가 저물고 새 해가 밝았다. 1월 2일 일요일 저녁에 문득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와, 이제 더 이상 그 바보 같은 시무식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참 뻘쭘한 순간이 있었다. 아무 말 대잔치 하는 회의 시간. 그것도 하루의 정신이 가장 말짱하고 몰입이 잘 되는 아침의 그 어중간한 시간에 많게는 전 직원을 모아놓고, 적게는 팀 단위로 모여 회의를 하는 그 시간은 정말 죽도록 싫었다. 하루를 침해당하는 기분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그래, 뭐 대표이사님이나 장 급의 인사가 한 말씀할 수는 있지,라고 최대한 양보하고 받아들여 준다 치자. 그러고 나면 꼭 그렇게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해봐' 타임은 왜들 그리 좋아하는지. 적어도 80년대 태생인 나에게 정서적으로 잘 맞지 않는 문화다. 여전히 낯설다. 아니 사실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들도 아니다 보니 그냥 싫은 것이다. 


적막을 해소하기 위해 말문을 여는 건 언제나 윗사람들부터다. 대부분은 그저 듣기 좋은 멘트들이다. 이제 그 쯤 사회생활했으면 더 웃전들이 어떤 말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안다. 단어 선택과 문장의 간결성. 그리고 기승전결. 마무리는 힘찬 내일과 분골쇄신하며 도약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진심이라고는 1%도 담겨있지 않은 정치적 발언으로 끝난다. 


듣는 내내 오그라 드는 것을 감추느라 혼났다. '내가 당신을 아는데!'라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힘겹게 삼킨다. '그냥 잠잠해라. 이 순간은 지나간다'라는 마음의 언어를 되뇌며 늘 그렇게 새 해 첫 월요일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나 혼자만의 시무식, 아니 시무식이라는 단어조차 사용하기 싫으니, 새해맞이를 해 보았다. 2022년 나의 앞날을 고민하며 이루고 싶은 것들을 기록했다. 최대한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허황된 말들로 부푼 꿈을 늘여놓는 나이는 이미 지났기에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시작된 연간 계획은 해내고 싶은 것들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진지하게 나의 인생 계획을 세워본 경험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부끄럽게도 이번이 처음이다. 40대에 접어들어 이제야 이런 고민을 하는 나도 참 인생 막살았다 싶다.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뭐든 필요할 때 행동하는 게 제일 진정성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잠시 찾아온 자괴감을 흘려보내고 다시 기록에 매진해본다.


직관적이고 단시간에 볼 수 있게 만들고 싶어서 평소 가끔 사용했던 노션의 대시보드 창에 바로 눈에 띄도록 적어 보았다. 연간 계획, 그리고 월간 계획, 주간 계획, 일간 계획 까지. 이루고자 하는 것들로 향하기 위해 오늘 할 일을 기록해보니 녹록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단순히 '나 이거 할 거야!'의 수준이 아니라 평소 나의 생활 패턴과 신체리듬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알고 있어야 좀 더 실천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연간 계획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심적 부담은 덜하다. 당장 하지 않아도 내일 하면 될 것 같은 유예 감을 준다. 그러나 일간 계획으로 내려올수록 부담은 백배 이상으로 커진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은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아니 나의 하루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조차 잘 몰랐음에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계획은 세우지 않았지만 나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계획성 있게 살아보려 하니 내가 나를 제일 몰랐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래서 연예인들에게 매니저가 존재하는가 보다 생각하게 된다. 셀프 매니징의 시작은 이렇듯 좌절감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다. 월요일부터 고민하고 노션에 기록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시행착오를 여유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최대한 비워본다. 직장 생활할 때 수년을 살아와서 가볍게 될 줄 알았던 미라클 모닝조차 버거워하는 나를 마주하며 빨간펜으로 찍찍 긋는 심정으로 계획을 바꾸고 평가하고 또 수정하게 된다.


이러다가 1월은 내내 계획만 수정하며 보낼지도 모르겠다는 심정마저 든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내려놓았다. 셀프 매니징을 위해서라면 그동안 없었던 '나'라는 페르소나의 데이터를 모으기 위한 시간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1월 한 달 동안에라도 잘 세팅할 수 있다면 나머지 11개월을 달릴 수 있으니 여유를 갖고 면밀히 기록과 분석을 기반으로 한 계획 수정 작업을 이어 나가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이제야 내가 참 그저 열심히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직장인으로 살아갈 때는 '적당히'가 가능했다. 어차피 묻어가는 흐름이 있었으니 적정성만 해내면 욕은 먹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나를 매니징 하는 것에 실패하면 인생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퇴사의 기분으로 유유자적 살 수만은 없는 가장이기에 오늘도 나는 나의 게으름을, 나의 나태함을 꾸짖으며 노션 페이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내일은 더 나아진 내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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