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선 명확한 목적지가 필요하다. 지속적인 내적 동기 유발은 방향이 뚜렷할 때 가능하다. 생각보다 우리는 목적지가 선명하지 않다. 두루뭉술하게 '월 천만 원 벌기', '경제적 자유'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왜 월 천만 원을 벌어야 하는지, 왜 경제적 자유를 이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하다.
내 주변에도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중에 누군가는 몰입도가 높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반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길 위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안타깝지만 나 역시 후자에 속한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를 돌아보면 더 분명한 동기부여를 외부에서 찾으려 했음이 잘못된 접근 방법이었음을 깨닫는다.
오늘도 책 속의 문장 앞에 나의 지난날을 비추어 본다.
목표와 동기가 없는 사람(그들): "동기를 유발해 줄 무언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저자: "동기는 오직 안에서만 끌어낼 수 있다."
그들: "지금까지 동기를 유발하는 중요한 인생 사건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저자: "동기와 목적은 개인의 선택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이룰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동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브렌든 버처드 저, <두려움이 내 삶을 결정하게 하지 마라> 중
나는 왜 그렇게 많은 날동안 동기를 유발해 줄 무언가, 누군가를 기다렸던 걸까?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차분하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감각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았을 땐 더욱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귀인을 만나는 행운이 있길 바랐다. 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따끔한 한마디를 통해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확실하고 분명한 목적지를 깨닫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길 기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귀인을 만나기 위해선 귀인을 알아볼 마음의 눈이 필요했음을 그땐 알지 못했다. 즉, 이 또한 명확한 목적지가 있고, 내적 동기가 있는 상황에서야 비로소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늘 알고 지냈던 한 사람이 어느 순간 귀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명확하고 강력한 동기가 일어나기 시작하니 그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비로소 메시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워런 버핏이라고 한들 누구나 그를 만나 같은 인사이트를 얻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 내가 원하는 삶을 먼저 이룬 사람이 있다 한들 그 사람과의 대화가 나에게 양분이 되기 위해선 결국 내 안에서 들끓는 동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저 "좋은 말씀이네요. 그런데 잘 와닿지는 않아요." 또는 "대화를 나눌 땐 명료했는데, 돌아서니 또 모르겠어요."라는 정도로 끝나는 게 당연하다.
정리하면 동기 유발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외부 자극은 불쏘시개와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불길을 꺼뜨리지 않기 위한 기름을 붓는 건 나의 목적지를 상기시키며 꾸준한 실행을 반복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좋은 건 같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서가 필요하다.
독서와 함께 또 한 가지 도움이 되는 건 매일 상태를 점검하며 기록하는 것이다. 내적 동기는 매일 '강-강-강' 상태로 이어질 수 없다. '강-약-중강-약'으로 오르내림이 존재한다. 기록은 완급조절에 도움이 된다. '약'의 상태에서도 동기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최근 몹쓸 글쓰기 모임에선 몹쓸 달리기, 걷기, 독서 등 다양한 모임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성장에 대한 내적 동기를 가진 작가님들과 서로 긍정의 자극을 나눌 수 있는 덕분에 최근 '약'의 상태로 내려온 나는 목적지를 향한 걸음을 지속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동기부여에 대해 오해나 착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목적지를 떠올리며 내면에 집중하며 그곳에 도달한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는 것. 그것이 내가 동기부여를 지속하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