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이 또 떠오른다. '근데 삶은 본질적으로 명료한가?'
삶의 답답한 순간을 지나다 보면 명료함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해야 가장 나다운 선택이며, 어떤 역할에 탁월한 사람인지에 대한 물음은 끝이 나질 않는다. 때론 그래서 주저하거나 좌절한다. 반면 어떤 날은 덕분에 새로운 여정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명료하지 않은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삶이 명료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 이유는 '나'에 대해 뾰족하게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알레'하면 '이거'라고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작가'라는 이미지는 각인된 듯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업'이나 '역할'에 대한 부분 보다 '어떤 꿈 또는 신념 또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호하다는 생각이다. 혹 주변에선 이미 뚜렷하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여전히 명료하지 않기에 때론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누군가 자기 삶을 이야기하면서 '아! 이거구나'라는 순간을 만났다고 할 때면 내심 부러웠다. 그럴 때마다 내 삶에 대해 '유레카!'를 외치는 순간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삶은 명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쩌면, 명료함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삶은 흐름이 아닌 도식이 되어버려요. 그보다는, 명확하지 않아도 놓치지 않는 감각이 중요해요. 나는 명료함보다 감각을 믿는다는 확언을 반복해 보세요. 나의 길은 선명하지 않아도 분명한 흐름 속에 있다는 믿음을 가져 보세요.
나의 고민을 GPT에게 털어놓았더니 한 마디 한 마디 참 주옥같은 답을 해줬다. 특히 '명료함'보다 '감각'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나는 대체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안갯속을 걸을 때 보이지 않아 멈추는 게 아니라 한 걸음 한 발짝을 조심스레 내딛듯 나의 감각을 믿으며 걸음을 내딛다 보면 삶에 대해 명료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쌓여 나아갈 삶에 대한 자신감도 커질 것이라는 믿음까지도.
퇴사 후 자발적 경로이탈을 선택한 뒤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새롭게 발견한 건, 나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심심치 않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선망하는 삶을 살고 있거나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말을 다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와~'하고 쫓아가다가 어느 순간 '근데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허탈함이 밀려오는 걸 종종 느꼈는데, 과거의 시행착오 덕분에 이제는 적절한 거리 두기를 할 줄 알게 되었다. 취할 것은 취하되 이게 지금 나에게 필요한지,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인지에 대해 나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물으며 불확실한 삶의 여정을 지속하는 중이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자기만의 해답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선택을 해도 충분히 가능하며 어떤 삶이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믿음이다. 다만 언제든지 그 믿음에 의심의 불이 켜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다시 돌아가 삶은 명료해야만 할까라는 질문에 오늘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답을 내린다. 명료하지 않아도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감각이 일깨우며 오늘도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