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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rce Jan 03. 2019

혐오한다는 것

혐오의 시작은 수축사회였다.


최근 '수축사회'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우리 나라 뿐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급과잉이 지나쳐서 성장이 멈추고 수축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내용 이었다. 자본주의는 투자를 함으로써 돈을 벌고, 그 돈을 또 재 투자하여 더 큰 돈을 버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미래가 장밋빛이라는 기대 하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시작되었다. 미래는 사실 장미빛이 아니라 흙빛이었달까? 기대와는 다르게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인구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오히려 부양해야하는 고령 인구만 늘고 있다. 이로인해 소비가 줄 것이고, 노동자가 줄 것이다. 소비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생산성은 오히려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공급이 줄지 않고 오히려 일자리는 감소할 것이다. 노동 계층은 일을 못하니 돈이 없을 것이고, 소비가 줄어들 것이다. 수요보다 공급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조선 사업, 자동차 산업, 핸드폰 사업, 택시와 카풀산업... 대부분의 산업은 제로섬 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보니 같은 파이(어쩌면 점점 줄어들 파이) 안에서 뺏고 뺏는 생존을 위한 난투극을 벌이게 된다. 모든 기회가 줄어드는 사회, 수축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여성 혐오, 남성 혐오, 지역 혐오, 세대 혐오.. 모든 혐오는 결국 기회가 수축되면서 시작된 사람들의 아우성이 아닐까? 예를들어 의자놀이와 빗대어 남녀 혐오를 생각해보겠다. 노래를 틀고 춤을 추다가 휘슬을 불면 재빨리 앉아서 의자를 차지한 사람만 살아남는 의자 게임을 모두 알 것이다. 과거에는 의자가 몇 개 없었다. 그 의자를 소수의 남자들이 독점하여 앉았고 여자들은 종교나 이념 혹은 폭력에 굴복하여 의자에 앉지 못하고 살아갔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팽창사회가 다가왔고, 의자의 갯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여자들도 일터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여자들도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여권이 신장된 것이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계속 경제는 팽창하고 있었으니까... 의자는 충분했다. 그러나 수축사회가 다가오면서 의자는 하나씩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성 여성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일자리를 경쟁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성들은 자기의 의자가 정당한 자기 것임을 과격하게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세대 갈등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들은 늙은 세대가 의자를 좀 비워줬으면 하고, 늙은 세대는 젊은 세대가 노력이 부족하여 의자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의자의 수를 늘리는 방법은 없는 걸까?


수축사회의 저자는 우리가 사회적 자본으로 수축사회를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자본이란, 쉽게 말해 사랑, 돕는 마음, 공정한 룰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자 놀이로 다시 예를 들면, 반칙없이 공정하게 룰을 정해서 의자를 나눠앉고, 가끔은 배려를 통해 둘이서 하나의 의자에 앉기도 하면서 이 시기를 이겨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다시 의자의 수가 하나 둘 씩 늘어날 것이란다. 하지만 사실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보면 이 말은 너무 이상적으로 들린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자본이 생길 수가 없는 구조이지 않은가? 역사상 한국의 사회적 자본을 무너뜨린 사악한 개인들은 친일파, 범죄자, 정치인, 갑질 기업인 등 얼굴을 바꿔오며 나타났다. 다수의 사람들의 선의를 이용하는 사건과 그 모든 것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오히려 지위를 올리는 사회적 발판이 되는 이 미쳐버린 사회. 선의로 손을 내밀었던 여학생과 다수의 기부자들은 이영학의 손에 잔인하게 배신당했고, IMF를 이겨내고자 결혼 반지까지 모으던 국민들의 선의는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대기업을 살리는 자금으로 쓰였다. 대통령은 비선실세를 두고 있었고, 믿었던 세월호 선장은 아이들을 버리고 혼자만 탈출했다. 이렇다보니 한국 국민들은 더이상 선의를 배풀거나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내 의자만 오로지 지키고자 할 뿐이다.


사회적 신뢰와 시스템을 되찾아서  위기를 극복하자는 . 너무나 맞는 말이지만 과연  광적인 한국 사회에서 어떤 집단이, 어떤 개인이 공정한 상식을 지키며, 서로를 신뢰하고 도울  있을까? 이렇게 우리는 모두 서로를 혐오하고 혐오하다가 죽어갈  밖에 없는 걸까? 언젠가 의자의 개수가 다시 늘어나서 모두가 의자에 앉을  있다면 사람들은 혐오를 멈출까?   살아남은 자는 과연 선한 자일까? 악한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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