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에 갑상선암환자가 되었습니다.
건강이 최고다.
건강 잃으면 다 소용없다.
이런 말을 꽤나 많이 들으며 자랐던 것 같다. 나의 경우는 20대의 여타 또래들보다 건강을 꽤나 신경 쓰는 편이었다고 돌이켜본다. 갑작스럽게 40대 초반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던 모친과의 이른 이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침마다 새벽에 운동을 하고, 되도록 가공되지 않은 자연식을 먹었다. 야식은 거의 안 했으며, 맵고 짠 음식은 피하곤 했다. 잠을 오래 자진 않았지만 규칙적으로 자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에게 엄격한 편이어서, 나만의 건강한 삶에 대한 규칙을 정해놓고 강박적으로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례 없이 건강한 편이었다. 그 흔한 감기나 장염이 나에겐 제일 아팠던 경험이었다. 뼈 한번 부러져본 적이 없었다. 몸이 약해 입원이 잦던 친오빠에 비해 너무 안 아프다 보니 오히려 아플 때마다 관심을 독차지하는 오빠가 부러웠었다. 하지만 이렇게 건강하던 나도 고된 7년의 회사생활 때문인지, 재작년부터 두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되었다. 재작년에는 15센티의 난소 혹을 때야 한다고 해서 수술대에 누웠는데.. 작년에는 갑상선에 암이 있다고 또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29살에 갑상선 암에 걸렸다. 림프절에 전이돼서 빨리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림프절에 전이된 이상 모든 갑상선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평생 호르몬제를 먹고살아야 한다고 했다. 희한하게 난소 혹을 작년에 수술했어서 그런지 마냥 수술하면 나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에 말씀드리고 한 달 병가를 내면서 내가 반년 간 일해온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염을 달고 살면서도 병원 가는 걸 미루셨던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정말 난 어쩔 수 없는 엄마 딸인가 보다 싶었다.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닌데.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수술을 한 직후 목이 칼로 난도질당한 것 같은 고통도, 2박 3일간 감금되는 방사선 동위원소 치료도 금세 지나갔다.
친구, 지인들.. 하나같이 모두가 갑상선암은 별거 아니라고 위로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정말로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약을 매일 잊지 않고 먹는 것'이나 '업무 일정을 조정해서 주기적으로 병원을 가야 하는 것' 혹은 '가끔 목이 매이는 것 같은 답답함, 그리고 몸이 전보다 피곤한 것'.. 그런 실질적인 불편함들보다는 '암에 걸렸던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아갔다. 목에 있는 흉터를 목티로 가려봐도 마음 깊숙이 드는 생각들까지는 가릴 수는 없었다. 외면해보려 해도 나는 이미 갑상선암에 걸렸던 사람인 것이고, 그 말인즉슨.. 슬프지만 이른 나이에 하자 있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보다 건강에 안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데, 왜 나만 아파야 하는 걸까? 몸이 아프다는 건 내가 몸을 혹사시켜서인 걸까? 내 능력치를 넘겨서 하려니까 무리가 왔던 건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내가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나 보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하려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업무도 적당히. 운동도 혹시 무리가 갔을까 싶어서 중단했다. 그냥 최대한 많이 자야겠다는 생각에 작정하고 틈만 나면 침대에 드러눕는 게으름뱅이가 되어보기로 했다. 욕심 많은 성격이어서인지 스스로에게 한계선을 그어본 것은 살면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술 전에는 늘 똑같은 하루하루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나마도 꿈을 품고 발전해가던 나날들이었다.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있었다. 해외를 갈 수도 있으니 영어공부를 하고, 결혼을 할 수도 있으니 연애를 하고... 이젠 다 끝났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면 누가 결혼하고 싶을까.. 호르몬제를 먹으면 아이를 가지는 데에도 지장이 갈지도 모른다. 결혼은 이제 내 욕심이 아닐까.. 해외는 병원비가 엄청나다는데 해외를 갈 수는 있을까? 약 값만 해도 엄청난데. 잠깐은 몰라도 아예 이민을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만약 암이 전이되면 어떻게 하지. 병원비라도 지원되는 지금 회사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 걸까?
똑같은 하루하루라고 생각했던 일상에서 장기 하나만 때어냈을 뿐인데 인생이 송두리 채 흔들린다. 사실 암이라는 것을 알고는 좀 더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드라마틱한 상황이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고, 일상은 전과 같이 조용하고 일관되게 흘러갔다. 건강을 잃음으로써 나의 미래는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오늘 난 생생하게 살아있다. 살아있으니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어떻게든 하루하루 연명해야 한다. 운 좋게 미리 알게 되어 수술로 치료할 수 있었다는 것에 안도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암환자라는 꼬리표는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미래의 가능성들을 포기하게 만들었지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은 날들은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