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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rce Jun 14. 2020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

어떤 가치관으로 판단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겉만 가지고 예측하는 이미지들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생각했다. 아마 나의 부친으로부터 오는 괴리감 때문이었을까. 서울대 나온,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두었다고 해서 그다지 번듯한 가정이 되는 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럴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그 아파트 안은 관리가 전혀 안된 쓰레기 장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잘 웃고 밝은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다. 그저, 태어나길 잘 웃을 뿐이다.


앞에 말한 것들은 모두 내가 어릴 때 정의되던 내 겉모습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선 흔한 이야기인데도, 어린 사춘기 중학생 여자 아이에게는 꽤나 큰 괴리였다. 그때부터일까, 오히려 반항하듯 겉과 내면을 뒤트는 것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생일 적에는 학생이 꾸미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였다. 항상 귀밑 5센티 단발에, 교복을 줄이는 것도 금지였다. (지금은 두발 자유화가 되었다고 들었다.)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목양말을 신느냐, 발목 양말을 신느냐도 정해줬다는 것이다. 내가 내 양말의 길이조차 맘대로 정할 수 없는 삶이라니. 도대체 그 모범적인 학생이란 것은 누가 정의하는 거지? 난 머리를 기르고, 교복도 줄였다. 그게 더 예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로드샵 화장품 가게에서 파운데이션이나 아이라인도 사서 그려보고, 렌즈도 꼈다. 그냥 그런 게 재밌었고,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디자이너의 끼가 흐른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딱 봐도 학교 규정을 어기는 용모. 나는 단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늘 오해를 사고 다녔다. 처음 부임해온 선생님이 내가 이 학교 일진이냐며 물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추가로, 친구들과 반 뒤에서 손뼉을 치며 놀고 있었는데 담배 피운 거 아니냐고 의심하던 선생님도 있었다. 나도 참 지독했던 것이, 나는 이렇게 나를 겉으로 판단한 사람들을 골려주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다. '당신, 나를 그렇게 봤겠지만 나는 모범적이고 바른 사람이야. 그렇게 판단한 당신이 더 문제 있는 거 아닐까?'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선지 전교 20등 안까지도 들어갈 만큼 나름 성적 좋은 학생이 되고자 했다. 공부는 둘째 치고, 나는 타고난 성정이 그리 남을 휘어잡고 괴롭힐 성격이 못되어서, 남들을 무시한 적도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난 그저 평범한 친구들과 맛있는 떡볶이 먹는 걸 즐기고,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기던 천진한 중학생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앞의 경우와는 정반대였던 시절도 있었다. 대학교에 가서는 갑자기 교회를 가는 것이 심취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뭔가 멋스럽게 꾸미는 것보다는 교회에 가고, 헌금을 내고, 봉사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전혀 화장도 하지 않았고, 옷도 잘 사지 않았다. 비싼 물건을 구매할 돈으로 좋은 곳에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을 냈다. 꾸미는 걸 너무 좋아해서 오해를 사던 중,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화장을 하고 꾸미고 다닐 때에는 꽤나 이성, 동성을 막론하고 인기 있는 편이었다고 돌이켜본다. 하지만 교회에 심취한 채로 2년을 보내고 나니, 나는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소위 말하는 '아싸'가 되어버렸다. 내 성향이나 성격은 그대로였지만, 내가 어떤 것을 소비하고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나는 정의되고 있었다. 중학교 때 꾸몄다는 이유로 내가 '일진'으로 오해를 받았듯이, 사람들은 나를 '아싸'로 오해한 것이었을까..?아니면 원래 난 아싸 성향이 있는 사람인가?  어떤 게 진짜 나인지 나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결국 나의 겉과 속을 뒤틀어보는 실험은, 너무도 명쾌한 답을 제시할 뿐이었다. 어떤 내면을 소유했던간에 그 누구도 보여지는 겉모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교칙을 어겨가며 개성을 드러내던 당돌하던 중학생과 '아싸'의 용모를 자처하던 대학생은 어느새 겉모습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보편적인 어른으로 자라났다. 이제는 겉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보이는 정보를 입수해서 나름의 판단을 해 생존하기 위한 동물의 본능이란 것을 잘 안다. 사람들은 시각적인 것에 약하다. 제일 빨리 입수할 수 있는 정보이고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위장하고 꾸며내기도 한다. 과대광고를 하거나, 능력을 뛰어넘는 명품을 사고, 성형을 하고, 외제 차를 몬다. 인스타그램 피드의 정사각형 이미지들은 그 사람의 취향을 어필하기에 적합한 수단이 된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하기엔 시대가 너무 변해버렸다.오히려 겉을 보고 어떤 올바른 가치관으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쉽지 않지만, 나는 '겉모습'을 면밀하게 체크하고 판단해서 남들이 모르는 원석이나 옥석을 발굴하는 것을 좋아한다. 생각보다 겉모습은 많은 뉘앙스를 전달해준다. 예를 들어서, 나는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 좋은 분위기 있는 식당보다는 허물어져 갈지언정 사람들이 항상 차있는 동네 한식집을 좋아하는 편이다. 궁서체의 녹이 슨 간판, 일관성 없는 식기.. 그 허물어져가는 듯한 한식집 특유의 포스도 결국은 겉모습일 것이다. 맛 말고는 승부할 게 없어 보이는 이 허름한 식당이 오랫동안 안 망한 걸 보면 맛집이 틀림없다..!라는 뉘앙스가 전달되니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라'라는 말은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라는 영어 문구도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말이다. 하지만 겉모습은 잘못이 없다. 우린 더 똑똑하게,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판단해야 한다. 겉모습을 면밀히 관찰한 후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 가게, 물건 속에서 '진짜배기'를 골라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나부터 나만의 뉘앙스를 품은 겉모습을 개발해서 남들에게 은근히 나를 소개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매력적인 겉모습을 만들어내는 것도 단단하고 매력적인 내면을 동반해야만 가능한 것일 것이기에, 오늘도 나는 사물, 사람의 겉모습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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