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 호의 둘리는
남의 부탁을 잘 거절 못하는 사람. 왜인지 맡은 일은 책임감 있게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베풀 줄 아는 사람. 분명 나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배웠었다. 분명 그랬는데... 요즘은 이런 사람을 통틀어 '호구'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호구는 바로 나라는 것을 회사 생활 3년 차 돼서야 알았다. 나는 부족하더라도 웬만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태도로 20년 넘게 살았기에, 회사에 와서는 어쩌다 보니 예스맨이 되어있었다. 음.. 그렇다고 늘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굳이 트러블을 안 만들려고 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되어있었다. 내 아이디어를, 디자인을 빼앗겨도, 나만 금요일에 남아 잡일을 해야 해도, 그저 그러려니 하며 팀의 성과에 도움이 되었으니 그거면 된 걸까?라고 생각하곤 했다.
회사는 내가 내 것을 주장하거나 욕심을 내면 같은 팀 팀원들이 피해를 보는 구조였다. 내가 무언갈 주장하면 누군가는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불편해서 속으로만 말을 삼키던 나였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정 반대로 행동했다. 자기가 한 것이 아닌데도 자기의 공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게 익숙한 듯 보였다. 그리고 재밌는 점은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그렇구나. 한다는 것이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는 것은 참 잔혹한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불편한 마음에 웬만하면 모든 것을 그러려니.. 했다. 물론 내가 말하지 않는데 남들이 알아줄리는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난 우리 팀의 공인 호구가 되었다.
난 타고난 강한 호구인지, 그런 상황에서도 꽤나 오래 버텼다. 그러려니.. 그러려니.. 그러던 내가 호구를 벗어나려고 본격적으로 발버둥 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그저 더 이상 물을 담지 못하게 된 컵에서 물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내 안에서 무언가가 흘러넘쳤다. 그 당시 나는 호구라서 부서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사람과 일해야 했다. 그 사람은 누구나 상대하기 싫어하는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부서장은 그가 모두가 기피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심 나라면 괜찮을 거라고, 넘겨짚었다. 그렇게 날 그와 일하게 했다.
그럭저럭 호구 생활을 연명하던 나는 점점 나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쳐갔다. 툭하면 회사 구석에 가서 혼자 울곤 했다. 싫다고 말을 하면 되었을 텐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그 사람은 모든 잡일을 나에게 떠 맡기고 늘 자신은 제일 돋보이는 일만 하려 했다. 모든 잡일을 마치고 나면 난 디자인할 시간이 없었고, 3일을 밤새며 집을 못 갔는데도 일을 끝내기는 벅찼다. 난 점점 호구인 데다가 무능한 사람으로 정의 내려졌다.
일은 일대로 하고, 무시란 무시는 다 당했다. 이대로는 난 나를, 다른 이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내가 호구를 벗어나는 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문제였다. 더 이상 호구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부서장님을 찾아갔다. 첫 번째 시도, 최대한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면담을 신청하고, 사무적으로, 논리적으로 상사를 바꿔달라고 말했다. 이 첫 번째 시도조차 나에겐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앞에선 알겠다고 했지만, 그다음 프로젝트도 난 그 인간과 함께였다.
두 번째 시도, 거의 악에 받쳐 울면서 사정을 했다. 그러자 그는 난처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니면 누가 해? 너 대신 맡게 될 다른 사원들이 불쌍하지도 않아?"라고. 정신이 아득했다. 그럼 나는? 매일 울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나는, 밥 한 끼 넘기기 힘든 나는, 안 불쌍한가? 지긋지긋하다. "너는 괜찮은 줄 알았어."라는 말.
내가 호구처럼 굴었던 것은 아마 그렇게 사는 방식이 익숙해서였을 것이다. 암묵적인 '배려'라는 것을 나는 당연하게 여겼다. 아니, 배려는 너무 착한 단어다. 그냥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은 마음, 굳이 서로 불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고 해야겠다. 서로 피해 주지 말고, 서로 선 넘지 말고 사는 것. 칼 자르듯 give and take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적당히 맞추고 적당히 서로 희생하는 관계를 가지며 살아왔다. 가끔 선을 넘는 사람들은 적당히 멀리하며 이런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왔었다.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겉으로 흘러넘쳤을 때, 생존을 위해 변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나의 표피로 느꼈다. 회사원인 나는 더 이상 호구로 살 수는 없었다. 나는 나를 스스로 지켜내야 했고, 나를 위해 변호해야 했고, 가끔은 날을 세워서 경계해야 했다. 내가 회사에서 봐온 처세술 중 제일 좋은 처세술은 앞에선 웃으면서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고, 뒷말로 자기를 변호하거나 남을 까고 다니는 것이었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었다.) 근데, 난 도무지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난 이제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다. 좋은 관계는 이 회사에 없다는 것을 안 이상, 앞에서 하하 호호 웃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호구가 되기 싫었던 나는 조금만 내가 정한 선을 넘으면 바로 화를 내거나 따지는 나쁜 사람이 되었다.
난 어쩌면 정당한 것을 요구한 것인데 왜인지 조금 악해진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 악해짐으로써 호구를 탈출할 수 있다면 기꺼이 악해지기로 했다. 이젠 호구가 아님으로써 내 삶은 조금 나아졌을까? 아니, 아니었다. 난 호구를 벗어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난 사람들을 경계하느라 늘 긴장하고 불안했다. 그리고 내가 방심한 사이, 호구가 된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엔 화가 속에서 끓었다. 너무 모든 것을 경계를 하다 보니, 대수롭지 않은 것에도 예민해졌다. 호구가 안되려던 것뿐인데 점점 피해의식에 휩싸인 것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나는 뭐랄까. 의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시끄러운 경적밖에 없는 자동차 같다. '빵!' 자동차 경적처럼 아주 아주 큰소리로 경고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정한 선을 넘었다는 것을 모르기에. 아니, 모른 채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