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회사원으로서의 나, 집에서의 나, 여자 친구로서의 나, 친구들과 나. 왜인지 조금씩 다른 사람인 것도 같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일까. 역할에 맞게 사람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겠다. 그런데 요즘은 직업이나 취미생활이 일로 연결되는 그런 경우들도 많아졌다.
예를 들어 유튜브를 하면서 회사를 다닌다거나,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며 프리랜서를 한다던가. 배달일을 하면서 음악가로 살아간다던가 하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 나만해도 종이 접기로 작품 활동도 하고, 글도 쓰면서, 직장인이기도 했다.
소위 '부캐'열풍도 그렇게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한번 사는 인생, 왜 한 가지 페르소나만 고집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이런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상이 사람의 인생에 더 좋은 발전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 분야에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도 막아주고, 더 다양한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곤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직장의 소속을 가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부캐로 만들어서 하면서도 지금 당장 수익 창출을 하거나 할 수는 없다.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기도 어렵거니와 회사에서 그런 상황을 좋아할 리 없기 때문이다. 왜 회사는 우리에게 한 가지 페르소나만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일까. 돈 주는 만큼은 일하고 있으니 자유시간 만이라도 내 미래 가치를 위해 투자하게 해 줄 수는 없는 걸까.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의 업무에 지장이 생길까 봐 그러는 것이겠다. 사장님들 입장에서 직원들이 다른 부캐를 만들어 뭔가 꿍꿍이를 짜고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직원처럼 느껴질 것이다. 회사는 노동자에게 투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건실한 관리자 노동자로 키울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다음은 책임져주지도 못하면서. 결국 우린 노동자이기에 방송에 나오는 개그맨들처럼 부캐를 쉽게 만들어가며 살아갈 수는 없다. 시간적으로도, 물적으로도.
내가 가진 다른 얼굴들은 어쩌면 30대인 지금부터 만들어야만 은퇴 후 진정한 나의 얼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회사원의 얼굴로만 살다가 은퇴를 한 뒤 아무 얼굴도 가지지 못한 채로 방황하고 싶지 않다. (우리 엄마 아빠 세대가 그랬듯.) 그러므로 나는 조금은 회사에서의 나보다 진짜 나와 가까운 얼굴로, 글을 쓰고,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나에게 다시 양분이 되어 회사로 돌아갈 힘을 길러줄 것이다.
뉴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취미를 노후의 자산 대책으로 삼고 싶어서가 아니다. 단지, 내일 당장 죽는다 하더라도 단 하루라도 나답게 살고 싶을 뿐이다. 진짜 나의 얼굴로. 어쩌면 내가 여러 얼굴로 사는 이유는 단지 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돈이 필요한 나에게 노동자의 얼굴이 하나쯤 있어주지 않으면 다른 얼굴들도 만들기는 힘들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