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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부르는 변화라는 것

by alerce

나는 기억이 나는 한 늘 쓸데없는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릴 적 영화를 볼 때부터 난 실화 기반의 고발성 영화를 보고 나면 우울해하곤 했다. (도가니, 살인의 추억, 추격자, 그놈 목소리 같은 영화들...) 아직 자아가 완전하지 않던 시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몰라서 최신 영화라고 하면 봐야 하는 줄 알던 때가 있었다. 그런 영화들을 보고 나면 몇 날을 극 중 피해자의 상황에 너무 공감한 나머지 슬퍼하고 억울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내가 그런 영화를 일체 보지 않게 된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 자신이 감당이 안될 정도로 감정 소모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취향이 생긴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의 기분을 지키기 위해 너무 극적인 인간사는 감정을 실은 콘텐츠보다는 사실만 기술하는 글로 접하려고 노력하곤 한다.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은 여러 매체를 통해 좋은 '능력'인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공감 능력이 발달한 사람으로서 단언컨대 현실에서는 장점보다는 단점에 가까운 능력도 뭣도 아닌 그런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놈의 쓸데없는 공감능력 때문에 타인의 고통까지 내 일처럼 겪은 기분으로 살던 나완 달리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은 세상에 아주 많더라.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은 냉정하고 그들밖에 모르기 때문에 남을 상처 주는 것에 큰 거리낌이 없다. 난 그런 사람들의 고독한 인생을 종종 안쓰럽게 여기곤 했는데, 이런 감정 때문인지 난 쉽게 그들의 먹잇감이 되곤 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나에게 엉겨 붙었고, 그들이 남긴 너무 많은 상처에 넌덜머리가 날 때쯤이었을까. 나는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론 또 이해하는 괴상한 도돌이표를 스스로 변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결국 나만 고통받고 있다는 것도.


'이해해주고 참아준 내가 문제였을까? 적당히 선을 그었더라면 좋았을까? 그들도 어릴 적 어떤 불행한 배경에 의해 저런 사람이 된 걸까? 저렇게 살아가면 진짜 믿을 수 있는 친구는 있을까? 그런 친구도 없다면 참 안타까운 삶이다... ' 그렇다. 내 생각은 나를 하대하는 그들을 욕하다가도 어느새 또 그들의 상처, 그들의 외로운 삶에 감정 이입을 하고 공감하고 있었다. (휴...)


이런 성향이 손해라고 느껴지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나를 바꾸려고 노력도 해보며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부단한 노력에도 나의 저주받은 공감능력은 그대로였다. (흑) 이왕 이렇게 태어난 것, 나는 내 공감 능력을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리라 생각하곤 한다.


최근의 나의 공감은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을 넘어서 사회, 동물, 지구 환경에까지 이르곤 한다. 내가 먹는 음식의 시작에는 우리 안에서 평생을 고통받으며 사는 동물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버리는 비닐 끝에는 마지막까지 태워 내뿜을 탄소 분자 하나하나가 있을 것이다. 무지해서 몰랐던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벽과 차별들이 만연해 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공감하기에 작은 것에서 그 시작과 끝, 보이지 않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감이라는 것에 대하여 글을 쓰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분명 내가 겪었듯 공감능력은 현대 사회에서는 이용당하기 좋은 불필요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감하기에 비건도, 제로 웨이스트도, 페미니즘도,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마음도 태어났으리라. 내가 아닌 약한 것들에 마음을 쓰고, 공감하기에 오늘을 더 나은 내일로 바꾸기 위해 노력도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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