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워크라는 x소리는 집어치웠으면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작가 알렝드 보통은 스쿨 오브 라이프라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인생 학교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지점이 있다.) 나는 멜버른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서점에서 책의 제목들에 이끌려 몇 권을 구입하였다가 알게 된 것들이다. 내가 이끌렸던 책들 중 하나의 제목은 'the sorrows of work ' (일의 슬픔)이라는 책이었다.(너무 이끌렸을 것 같지 않나요..?)
여기서는 각종 자본주의에 의해 얼마나 노동자로서의 삶이 고단하고 슬픈가에 대하여 적혀있었는데, 인상 깊었던 부분은 '협업'이라는 것이 노동자들에게는 사실 그다지 좋은 업무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옛날 옛적 우리가 신분사회였던 때를 돌이켜보면, 노동자였던 계층은 시키는 일을 단순하게 할 뿐, 같이 싸우거나 같이 경쟁을 하며 일을 하지는 않았다. 누가 더 잘한다고 해서 뭐가 그리 나아질 것은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들도 공방이나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자기와의 싸움을 이루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현대 사회는 협업이라는 이름 하에 같은 팀 안에서의 경쟁을 종용하며, 심지어 같이 협업을 해야 하는 유관부서와도 늘 업무를 핑퐁 치며 다투곤 한다. 분야도 세분화되어있기 때문에 말로만 개뿔 협업이다. '이거 이렇게 가능한가요?' '죄송하지만 이러이러하여 어렵습니다.' (할 수 있으면서 일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타사 제품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반영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그런 기술이 없어서요...' 이런 대화들이 정녕 협업인가. (서로 일단 방어적인데..)
같은 부서 안의 동료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동료들은 협업한다는 아름다운 말 가운데 경쟁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혼자 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혼자 동화 속에서 아름답게 살고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내가 그랬으니까.) 내 아이디어를 술술 내뱉어내었다간 다른 사람들이 어느새 채가고 있을 확률이 99퍼센트인 이 환경에서 협동이라니. 절대 어떤 목표를 위해 함께 나아간다는 팀워크. 그런 가식 된 말은 집어치워줬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회사의 경쟁 시스템이 문제일 것이다. 판을 그렇게 짜두고는 말로만 협업을 종용한다. (퉤)
나는 어릴 때부터 늘 협업의 가치를 믿어왔다. 분명 사람들은 같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때 더욱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경쟁은 항상 답이 아님을 안다. 같이 얘기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그것이 '우리'의 결과물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팀워크가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은 개개인의 퍼포먼스에 한계치가 있다. 당연하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도 실수를 한다. 또한 아무리 부족해 보이는 사람도 장점이 있다. 현대 사회 이전에는 우린 늘 서로 힘을 합침으로써 보완할 수 있게 살아왔다.
일에도 궁합이 있다고 한다. 유명한 표도 있다. 멍부, 멍게, 똑부, 똑게. (멍청한 부지런한 사람, 멍청한데 게으른 사람, 똑똑한 부지런한 사람, 똑똑한데 게으른 사람) 이렇게 나누어 서로 궁합을 보는 것이다. 신입사원 때는 이 표가 그리 와 닿지 않았는데 어언 8년 차 직장인에 이르자 가끔 이 표를 떠올리며 이해가 안 되는 대상들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하곤 한다. '저 사람은 멍청한데 부지런할 뿐이야.'라고.
나는 저 표에서 '똑똑하고 멍청하다'는 기준은 일을 하는 사람끼리의 상성으로, 서로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항상 똑똑할 수 없고 항상 멍청할 수도 없다. 같이 일하는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가 멍청하다면 누군가에겐 내가 멍청한데 부지런한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은 바뀌지 않는 것이기 특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자신이 멍청하든 똑똑하든 항상 일을 벌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게 바로 나다.) 게으른 사람들은 속을 알 수 없지만 뭐 하나라도 안 하려고 버티는데 익숙하다.
우리는 이런 상성 속에서 스트레스받으며 업무를 진행한다. 같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새로운 물건,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주 먼 여정이며 이 여정을 계속 피 튀기는 싸움 속에서 진행해 나가야 한다. 인생 학교의 책에서처럼 우리는 본디 장인 정신을 가지고 혼자 일하는데 익숙한 생활을 해왔다. 노동자들은 몸이 힘들지언정 정신은 편안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요즘은 정신까지 고통받으며 성과가 나쁠 때는, 성과를 빼앗길 때는 시스템이 아닌 자신을 자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그렇게 판을 짜 놓고는 모든 책임을 개인의 능력에 맡겨놓는다. (성과가 좋을 때는 '우리'의 공로이고, '팀워크'의 결과라고 하지요.)
나는 요즘 일을 쉬면서 친구의 작은 작업실에서 개인 작업을 하곤 한다. (집에만 있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충고로..) 코로나 시국이라 어디 나가기도 그래서 소수만 있는 작업실에 나가는 것인데, 같이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을 꿈꾸며 협업을 할 때, 아 이런 게 진짜 같이 일한다는 거구나. 느끼곤 한다. 경쟁이 아니다. 더 좋은 무언가를 위해 같이 머리를 마주하고 서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발전을 위한 비판을 한다. 그리고 또 수용을 하고 나아간다. 이런 핑퐁을 겪으며 더 나은 제품, 서비스,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그래, 이게 같이 일한다는 것이었지. 긴장하고 경계하는 것만이 팀작업은 아니었지.' 놀라워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렇게 사람은 일할 수도 있었구나. 이게 동료구나. 그랬구나.
난 누군가에게 멍청한데 부지런한 고통을 주는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서로 도우는 관계였다면 멍청한 부분보다 부지런하다는 부분을 살려 보완할 수 있었을 텐데. 회사에서 나는 그러지 못했고, 그들도 그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