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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rce Jan 04. 2021

내 취향을 추천해준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건지 좋아하게 만든 건지..

최근에는 취향을 추천해주는 것이 점점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내 취향을 먼저 알아서 알려주다니 놀라운 기술임이 분명하다. 사실 서비스 초창기에는 '에이, 난 이런 거 안 좋아하는데 무슨 추천 서비스야.'라고 생각했던 서비스인데도 요즘은 오히려 흠칫 흠칫 놀라곤 한다. 내가 검색한 모든 것을 기반해서 알맞은 물건의 광고들이 연달아 뜨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취향이라는 것이 없었던 소녀였다. 취향이라기보다는 유행을 따랐다고 해야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래퍼인 이센스님은 이런 어린 시절의 나를 대변하는 가사를 이렇게 적으셨더라.


아침 버스에 꽉 껴 똑같은 옷 입고 학교 다니며 든 버릇인지

하여튼 전부가 눈에 띄는 놈 못 잡아먹어서 안달.

그러면서 평범하단 소린 또 듣기 싫잖아.

그래서 찾아다닌 다는 게 고작 유행?

제일 촌스러운 짓들 보고 엄지 드네

<이센스- A-G-E>


난 제일 촌스러운 짓인 유행을 좇는 것이 익숙했다. 평범하기는 싫었는데 대안이 없었다. 아마도 20대 초반까지 그랬다. 그때만 해도 다들 샤기컷을 하면 우르르 샤기컷을 하고, 누가 쫄쫄이 바지를 입으면 다 같이 그런 바지로 입었다. 반윤희 스타일이 유행할 때는 카고 바지에 품이 넓은 후드티, 혹은 맨투맨에 레스포색 가방을 메지 않으면 촌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취향이 아닌 상업적 유행이 물건을 팔던 시절이었으리라.


하지만 30대가 다다르자  나 개인적으로의 벌이가 늘어나면서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과소비에 물이 오르면서 이것저것 마구마구 사기 시작했다. 어떠한 물건 자체가 나를 대변한다는 생각까지에 이르렀다. 난 이 브랜드를 가짐으로써 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소비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샀고 또 샀다. 내 취향이라는 '이유'로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사곤 했다. 옷장은 점점 터질 것 같았다. 모자도, 신발도, 가방도 10개가 넘었다. 1년에 한 번도 매지 않는 것이 수두룩했다. 난 극단적인 맥시멀 리스트였다.


이런 나의 행위에는 추천 서비스도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오프라인에서는 편집샵이, 온라인에서는 추천 서비스가 우리를 소비의 길로 이끈다. 물론 내가 꼭 찾던 어딘가를 긁어주듯 추천해줄 때는 참 기묘한 기술이다 싶다. 고마울 때까지 있다. 이런 크기의, 이런 색상의 , 이런 것. 이런 비트의, 이런 가사의, 이런 뉘앙스의 노래. 이런 느낌의 조언을 해주는 사람. 이런 것을 설명해주는 영상들. 어떻게 알고 이렇게 딱딱 추천해주는지 영악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본인의 취향이 확고한 사람들, 본인이 자신을 잘 통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서비스는 분명 약이다. 잘 고르고 골라 똑똑하게 섭취할 것이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소비의 세계, 상업적 음악이나 영상에 끌려다녀본 나에게는 도리어 이런 서비스는 병적인 것이었다.


가끔 내 글조차 어떤 알고리즘을 타고, 어떤 추천 서비스에 의해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겠지. 생각한다. 어디 메인에 소개가 되거나  때면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마치 로또에 당첨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서비스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추천 플랫폼을 가진 자들일까. 대중일까. 창작자일까. 예전처럼 유행을 만들어내서 소비자가 우르르 쫒게 만드는 게 쉬웠을까, 세분화된 취향을 다양하게 골라 보여주는 것이 쉬울까. 도대체 그놈의 취향이라는 놈의 실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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