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밴쿠버 펄스 크릭은 항상 배들이 빼곡히 차 있긴 하지만, 새로 온 파워보트 하나가 유난히 가까이 닻을 내렸다.
"우리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요!" 소리 질러 외치자,
"여기 자주 닻 내리는데 이 정도면 괜찮아요!"
라고 답한 중년 남자의 배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과 그보다 더 긴 머리, 그리고 문신으로 덮인 거대한 배가 눈을 사로잡았다. 순간 '이 사람도?' 싶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깨끗한 배의 상태와 닻을 내리고 보호장치까지 설치하는 꼼꼼함을 보니 홈리스는 아닌 듯했다. 동네 잘 아는 아저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뭐-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배들이 닻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꼭 충돌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아저씨 말대로 우리 두 배는 돌아가면서도 부딪치는 일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콕핏에 나가 본 어느 오후, 작대기 훅으로 우리 배를 밀어내느라 낑낑거리는 아저씨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이 동네는 바람이 항상 이상해요. 지금은 내 배가 너무 높아서 그쪽 배한테 갈 바람을 막나 봐요.."
그런데 둘러보니 이상하게 우리 배만 뱃머리 방향이 달랐다. 더욱 이상하게도 바람이 배 옆방향에서 불고 있었다. 닻 내린 배에서 뱃머리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순진하게 지역 전문가(?) 아저씨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 다른 세일링 요트 하나가 눈에 들어오자 머리에 번개가 쳤다. 그 세일링 요트도 우리와 뱃머리 방향이 같았다.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킬이 수면 밑으로 깊게 내려오는 세일링 요트들이 해저 진흙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람이 돌아도 배가 돌아가지 못하고, 물에 떠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다른 배들과 충돌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호라이즌스 호는 닻 체인을 깔고 앉은 듯 이상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배는 안정적으로 앉아있는 듯 보였다. 주위를 돌아보니 물이 빠져 수 미터 높이의 해안 돌들이 젖어 있었다. 어젯밤 산책하다 보름달을 보았는데 혹시 그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보름달과 그믐달 때 조수 차가 최대가 된다고 한다.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이 항해가 만만한 일이 아니겠다는 생각에 휩싸인 채, 이제 바람이 바뀌어 반대 방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아저씨의 배를 밀어내려고 기다렸다.
세일링 요트들만 뱃머리 방향이 이상했던 것은 사실 해저에 닿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호라이즌스 호와 같은 무거운 풀킬 요트는 모터보트나 가벼운 배들에 비해 해류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강한 해류가 있을 때 이런 무거운 풀킬 요트들은 바람보다 해류 방향을 따라 뱃머리가 돌아가게 된다.
나는 꽤 오랫동안 이 현상이 호라이즌스 호가 해저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잘못 믿고 있었다. 그러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현지 세일러가 실제 원인을 설명해 줘서 나중에서야 깨닫게 됐다.
밴쿠버에서 일주일, 드디어 출항 날짜를 정하고 나자 늘어져 있던 몸과 마음에 긴장이 돌았다. 그래서인지 그제야 입국 심사 전에 항해 허가증 같은 것이 혹시 필요할지 의문이 생겼다. 주한 미국대사관에 우리 항해 계획을 첨부하고, 혹시 추가로 필요한 서류가 있는지 문의를 했다가 충격적인 답을 받았다:
"You will need a valid U.S. visa, not ESTA. 유효한 미국 비자가 필요합니다. ESTA가 아니라."
ESTA: 전자 여행허가서, 사전 등록과 비용 지불만으로 쉽게 취득 가능
이 항해는 캐나다, 미국과 멕시코 3국을 거치므로 진작에 입국에 필요한 서류 검토를 마쳤다. 다만, 우리가 간과한 디테일은 '요트'였다. 개인 요트로 국경을 건너는 사람은 정식 관광 비자가 필요하다. 코로나 영향으로 요즈음 미국 비자받는 데 1년 넘게 걸린다는데, 그럼 이제 와서 이 일을 어쩔 것인가!
가능한 대안에 대해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사람 시켜 배를 미국 국경까지 운반하고 우리는 페리를 타고 가는 방법, 캐나다 영주권자인 선주 혼자 국경을 통과한 뒤 나만 페리 타고 가서 합류하는 방법, 아니면 오프쇼어로 나가 미국을 통째로 건너뛰고 멕시코 입국을 하는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까지 나왔다. 브레인스토밍이 거침없이 엇나가자 선주가 과감하게 핸드폰을 들더니 포트 앤젤레스Port Angeles 국경순찰대에 전화를 걸었다. 건조한 목소리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지금 뭐 하던 일이 있으니까 30분쯤 있다 전화하겠습니다."
친절한 캐나다 사람들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는, 본인 하던 일 끝난 뒤 통화하겠다는 그녀의 기개에 기가 죽었다. 권위적이고 불친절한 이미지의 미국 국경 경찰을 상대로 문제 해결을 해야 하다니 막막했다. 그러나 30분 뒤 재개된 통화에서 이 차가운 음성의 여성 경관이 의외로 우리에게 한 줄기 희망을 안겨 주었다. 우리는 한국인이라 ESTA만 있으면 비자는 필요가 없고, 대신 스마트폰 앱으로 요트와 승선원 정보를 등록하고, 또 다른 웹사이트에서 1년 유효한 항해 허가증을 구매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전화받으시는 친절하신 경관님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윌슨입니다."
우리는 윌슨 경관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출항 준비를 마무리했지만 가슴 한편엔 그녀가 틀린 정보를 준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포트 앤젤레스 국경순찰대 이외의 모든 곳에서 이 경우 비자가 필요하다고했고, 그 스마트폰 앱도 알아보니 캐나다 시민권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인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떠오르는 의심을 다시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처넣고 출항을 결정했다.
우리가 포트 앤젤레스에 가려면 지나야 할 첫 번째 관문은 액티브 패스Active Pass로, 갈리아노Galiano 섬과 메인Mayne 섬 사이 폭이 좁은 바다이다. 조류가 강해서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순간, 즉, 물이 멈추어 있을 때 통과해야만 한다. 오늘 밴쿠버에서 출항해서 해 지기 전에 액티브 패스를 통과할 수 있는 시간은 17:40쯤에 있었다. 여기서 약 35해리 떨어져 있으니, 여유 있게 배 속도를 5노트로 잡으면 7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이다.
그동안 동트는 새벽의 장엄한 출항 장면을 너무 많이 상상해 왔던 탓인지, 늦은 오전에 출발해도 된다는 계산에 왠지 마음이 느긋해져 버렸다. '일찍 도착해서 기다렸다가 딱 5시 40분에 통과하자'라는 계획이 무색하게, 출항 시간이 자꾸 늦어졌다. 드디어 마지막 준비를 마치고 닻을 올리려고 콕핏에 나오니, 이런, 뱃머리가 또 이상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저녁 물이 붇기 시작해 오늘 오전엔 배가 물에 뜨겠구나 했는데, 시간이 늦어지면서 다시 물이 빠져버린 상태였다. 다행히 수염 아저씨의 파워보트는 일찍 출항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풀킬이니까 어떻게 되지 않을까.."
천천히 전진 기어를 넣어 보았다. 우리의 호라이즌스 호는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진흙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출항하는 길에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과 물을 가득 채울 계획이었으나 주유 선착장에 이미 다른 배가 있었다. 이제 마음이 급해진 선주는,
“가는 길에 주유할 데가 한 군데 더 있다"라고 했다.
하지만, 연료와 물은 가득 채우고 출항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출항 시간은 더더욱 늦어졌다. 역조류가 있는지, 마음은 급한데 엔진으로 가는 배 속도가 5노트가 되지 않았다. '미리 가서 닻 내리고 기다렸다 통과하자'는 이제, '정 안되면 근처에 닻 내렸다가 내일 통과하자'로 기조가 바뀌었다.
다행히 중간에 바람이 불어 주어 시간을 좀 회복했고, 액티브 패스는 18:30에 통과할 수 있었다. 특정 지점을 주어진 시간 안에만 지날 수 있다는 개념이 신기했는데, 거친 물결을 보니 수긍이 갔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일렁이는 거대한 물 덩이들에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늦었기에 원래 목적지 시드니 스핏Sydney Spit 보다 가까운 오터 베이Otter Bay에서 오늘밤 쉬어가기로 했다. 잔잔한 만에 다가가자 숨이 멎을 듯한 경치가 숨어있었다. 닻을 내리고 성공적인 출발과 액티브 패스 통과를 기념하기 위해 저녁을 준비했다. 북적거리는 밴쿠버에서 오랜 시간 닻 내리고 지낸 뒤, 이제야 캐나다의 자연 속에서 항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노랗게 지는 저녁 해와 만을 빼곡히 둘러싼 침엽수림, 서늘한 공기와 맑아 보이는 물.. 무엇보다 이웃 배들이 없다. 멀리서 지나가는 여객선 때문에 종종 배가 흔들리긴 했지만 오터 베이에서 편안한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