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ASYSAILING Sep 27. 2024

이것이 미국 국경이다

그리고 이것이 판토찌다

새 배의 성대한 진수식에 시장, 해양수산부 장관, 남작부인 등 저명한 인사들이 모였다. 모두가 배의 세례 의식을 열렬히 기다리며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배에  세례를 주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은 백작부인이 선체에 샴페인 병을 부딪칠 준비를 하고 섰다. 그녀가 힘차게 병을 휘두르자, 뜻하지 않게 판토찌의 머리에 맞아 그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라 어쩔 줄 모르며 백작부인이 외쳐 물었다.


"진수식 총감독님, 한 번 더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백작부인! 하지만 이번엔 좀 더 중앙을 겨냥해 주세요."


물에 빠져 정신이 없던 판토찌는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자마자 두 번째 샴페인 병에 가격 당하고 말았다. 그는 차라리 물속에서 행사를 관전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해, 잠수해 있기로 했다.


"진수식 총감독님, 또 한 번 더 해도 될까요?"


백작부인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애원했다. 그러나 행사가 계속되면서 시장, 해양수산부 장관, 남작부인이 순서대로 샴페인 병에 맞아 불운한 진수식을 당했다. 


https://youtu.be/nAf65ePG2tw?t=2


이 항해를 하면서 선주는 판토찌라는 상징적인 캐릭터와 친숙해졌고, 우린 판토찌스러운 행동을 할 때마다 서로를 판토찌라 불렀다. 판토찌는 1970년대 이탈리아 코미디 걸작인데, 매일의 삶에서 어려움과 고난에 맞서다가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 여러 황당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그 강렬했던 멍청함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판토찌의 한 장면scena da Fantozzi'이란 관용구가 쓰일 때마다 회자된다. '서투르고, 어색하며, 무엇보다도 약자인' 상황에 쓰이지만, 더 간단히 말해 '바보짓'으로 축약할 수 있다. 이제 캐나다의 오터 베이에서도 판토찌의 한 장면이 펼쳐질 참이니, 기대하시라:



오터베이의 판토찌


출항 전 항상 엔진 룸을 열어 점검한다는 선주. 오늘은 엔진 룸 덮개 전체를 들어 올리는 대신, 윗면에 있는 작은 쪽문만 열고 안을 살피더니 그 아래 주입구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러더니,


"부동액을 더 채워야겠네." 단호히 말했다.


검은색 니트릴 장갑을 끼고 직접 엔진 점검을 하는 모습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시키는 대로 콕핏 라커에서 부동액 통을 찾아 건네주니 형광 초록색 액체를 꿀렁꿀렁 주입구 안으로 흘려보냈다.


"부동액이 이렇게나 많이 들어가네. 하나도 없었나 보다."


"원래 이렇게 한 번에 한 통 다 쓰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비명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것은 부동액 주입구가 아니었다. 엔진오일 주입구였다! 패닉에 빠져 얼굴을 쥐어뜯던 선주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전화기를 들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막 잠자리에 들었던, 엔진을 잘 아는 한국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자다 깬 친구는, 부동액이 엔진 오일보다 밀도가 높아 아래쪽에 모이니, 엔진오일펌프로 빼내라고 했다. 부동액과 남은 엔진 오일을 다 제거한 뒤에도 걱정을 떨칠 수 없었던 선주는 엔진오일을 다시 부어 두 번이나 헹구어 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엔 엔진오일을 너무 많이 채우는 실수를 했다. 게이지는 이제 상한선의 두 배가 넘는 눈금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필 이 중요한 순간, 좀 전까지 잘 작동하던 엔진오일펌프마저 고장이 나 버렸다. 이젠 과량의 엔진오일을 빼낼 방법이 없어졌다. 국경순찰대 사무실 문 닫기 전에 포트 앤젤레스에 도착하려면 빨리 출항해야 하건만 한국은 이제 새벽 시간. 깊이 잠든 친구를 깨울 순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시차가 다른 이탈리아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상한선 눈금까지는 빼내야지 지금 그 상태로 엔진 돌리면 절대로 안돼!"


친구의 가이드에 따라 엔진오일 배출구 레버를 연 뒤, 배출구와 고장 난 엔진오일펌프 사이를 연결하는 호스를 빼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호스를 이리저리 틀어보고 흔들어 보고 하는 사이에 어딘가 새는 틈이 생겼는지 엔진오일은 서서히 빠져, 드디어 상한선 눈금까지 빠졌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뒤 엔진 시동을 거니 언제 무슨 문제가 있었냐는 듯, 부릉부릉 힘차게 돌아갔다.


문제를 해결하고 긴장이 풀리자, 섣불리 엔진 시동 먼저 걸지 않고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나 싶었다. 첫 번째로 엔진오일에 부동액을 붓는 실수를 했을 때 엔진을 돌렸다면 물과 기름이 섞인 흰 크림 같은 게 생기며 엔진을 손상시켰을 거라고 한다. 엔진오일이 상한선을 넘는 상태에서 엔진을 돌렸어도 넘치는 엔진오일이 연소되며 쌓인 이물질이 노킹 현상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엔진을 깨우기 전에 이 문제들을 모두 해결했다. 애먼 친구들은 좀 깨웠지만.


연이은 실수를 수습하다 보니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였던 포트 앤젤레스는 포기하고 10해리쯤 떨어진 시드니 스핏Sydney Spit을 향해 닻을 올렸다.



바람 불고 붐비는 닻 내림 명소


예보에 의하면 센 바람은 저녁부터 분다고 했는데 만을 빠져나오자마자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거대한 제노아genoa 대신 스테이세일staysail과 축범한 메인세일mainsail로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걱정하던 대로, 강한 바람 속에서 세일을 쉽게 조정하기 어려웠다. 오프쇼어용 요트라 그런지, 한번 세팅해 놓은 세일을 신속하게 조정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데크가 구성되어 있는 데에다 나무 재질의 구식 도르래도 뻑뻑했다. 오프쇼어 요트는 장거리 항해용으로 설계되기 때문에 세일을 자주 조정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나무 도르래들은 보기에는 멋있지만, 실제로 큰 하중을 걸어 쓰기에도 안전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긴장을 유발했던 바람도 곧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에는 배가 겨우 1노트로 나아가면서, 가고 있는 건지 그냥 떠있는 건지 모르는 상태에 이르렀다. 다행히 오늘 10해리만 가면 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여유롭게 가자는 마음은 지나치게 느슨해져 버렸고, 결국 해가 지기 직전에야 겨우 시드니 스핏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드니 스핏은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 들이 닻 내리는 곳으로 인기가 많다. 길고 넓은 만인데도 배로 가득 차 있었다. 해저 지형도가 조금 복잡했는데, 수심이 깊은 곳과 낮은 곳이 고르지 않게 섞여 있고, 전체적으로 깊지 않았다. 빼곡한 배들 사이에서 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3-4미터 수심에 닻을 내렸다. 콕핏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잠시 아늑한 실내에서 쉬었다 올라왔는데, 호라이즌스 호가 수많은 배들 사이에서 홀로 꿋꿋하게 대세를 거스르고 있었다. 뱃머리가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걸 보니 또다시 해저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밤이 되니 물이 또 빠졌나 보다. 문제는 해저에 앉은 배들과 물에 떠 있는 배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물에 떠 있는 배들은 바람 방향에 따라 돌아가고 해저에 앉은 배들은 다들 체인을 깔고 앉아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앞에 있는 배는 비슷한 크기의 세일링 요트였지만, 현대적인 핀킬을 가진 가벼운 요트였다. 우리 호라이즌스 호와 달리, 그 배는 정상적으로 바람 방향을 향해 있었다. 바로 근처지만, 수심이 깊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면 반면, 해저에 앉아 꼼짝 못 하는 우리 호라이즌스 호와 부딪힐 위험이 있었다.


앞 배 사람들은 헤드램프를 착용하고 급하게 콕핏으로 나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종일 이어진 사건사고 때문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너무나 피곤했던 나머지 "저쪽 배가 발견했으니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겠지.." 하고는 피로에 무너지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전 이야기에서 언급했듯이, 무거운 풀킬 요트인 호라이즌스 호는 바람보다 해류 방향을 따라 뱃머리가 돌아간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몰랐던 당시, 우리 배는 해저에 앉아 있고, 앞쪽 요트는 물에 떠있기 때문에 뱃머리 방향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 배가 가벼운 현대식 핀킬 요트였기 때문에 우리와 뱃머리 달랐던 것이다.



포트 앤젤레스


다음날 새벽. 오늘 국경순찰대와의 약속시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밖에서 외치는 소리 없이 꿀잠을 잔 것을 보니 앞 배와는 충돌이 없었나 보다. 밤새 헤드램프 쓰고 조마조마했을 앞 배에게는 미안했지만 말이다. 실은 상황에 대응할 책임이 더 늦게 닻 내린 우리에게 있고, 필요하면 닻을 옮기기라도 했어야 했다. 


호라이즌스 호는 여전히 해저에 앉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해 본 진흙 헤치기, 이제는 의심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해가 뜬 직후 아름다운 무지개도 만났다. 습하고 서늘한 기후에 시야를 가득 채운 침엽수림, 그 위로 무지개. 느낌이 좋은 아침이었다. 왠지 오늘 국경을 통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벼운 바람이 있는 듯도 하여 세일을 펴 보았지만 내내 힘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순전히 해류의 힘으로 속력이 8노트를 넘었다. 무서운 속도였다. 그때 우리 배 근처를 지나던 배와 이후 포트 앤젤레스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는데, 그 배는 세일을 전혀 펴지 않고 무려 11노트를 찍었다고 했다. 이 해류 덕분에 포트앤젤레스 주유 선착장에는 오후 1시쯤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스마트폰 앱을 통해 입국신고서를 제출하고 국경순찰대에 전화를 해 도착을 알렸다. 곧 경찰 정복에 방탄조끼를 입은 4명의 경관들이 선착장에 등장했다. 여권과 인쇄한 ESTA를 제출하자, 그중 한 경관이 우리가 내내 걱정하던 답을 했다:


"아니요, 당신은 유효한 미국 비자가 필요합니다. ESTA가 아니라."


우리는 새삼 놀란 척을 하며, 스마트폰 앱과 온라인으로 구매한 항해 허가증에 대해 설명했으나,


"아니요, ESTA는 소용이 없습니다. 비자가 필요합니다."


융통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인상의 경관이 단호한 대답을 두 번 반복하자, 순간 위축되었다. 이제, 비장의 카드를 꺼낼 때가 된 것 같았다. 윌슨 경관의 이름을 댈 때가 왔다.


"윌슨 경관님으로부터 그렇게 안내를 받았는데요."


모두의 시선은 아까부터 일행과 떨어져 먼바다를 바라보던 금발 쪽진 머리를 한 경관의 뒤통수로 쏠렸다. 그녀는 그제야 돌아서서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윌슨 경관마저 비자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제 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틀간 항해한 길을 되돌아가 캐나다로 쫓겨날 위기가 코 앞에 있었다.


경관들은 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더니 회의를 하는듯했다. 아까의 단호한 경관이 다가와 웨이버 비자에 대해 설명했다. 비자가 필요한 줄 모르고 이미 도착한 경우, 단수 입국 허가를 즉석에서 주는 비자라고 했다. 다만 비용이 일인당 585달러, 우리 두 명은 무려 1,170달러에 이르렀다.


"만약 저 옆의 페리 타고 왔으면 그냥 ESTA로 통과가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똑같은 국적의 똑같은 사람인데 미등록 교통수단으로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거금을 내야 하는 건 왠지 억울했다. 이탈리아에 오래 살며 배운 게 있다면 이런 비합리적인 행정의 덫을 피해 가는 요령. 이탈리아 행정의 경직되고 뒤떨어진 시스템에 맞서 변칙적이고 창의적인 우회로를 찾느라 뼈가 굵었다. 


"그렇다면 저 페리 타고 갔다가 페리 타고 다시 오면 안 되나요? 배만 여기에 한 이틀 놔 둘 수 있다면.."


경관이 단호하던 표정을 놓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경험상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네 명의 경관들은 또 한 번 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회의를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가더니, 한참 뒤 '비용 면제' 웨이버 비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은 무려 'Waived waiver visa', 즉 (비용) 면제된 면제 비자이다.



또 다른 복병


자칫 항해가 엎어질 수도 있던 비자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이 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이제 바로 옆에 있는 마리나에 배를 묶고 내일은 그동안 세관 심사 때문에 미루던 식료품 장을 실컷 볼 것이다. 그리고 모레 출항하면 이제 본격적인 미국 탐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배경음악으로 신나는 축가가 울려 퍼지는듯한 느낌이었다. 마음고생이 컸는데, 더없이 훌륭한 시작 같았다. 흥분 속에서 축하의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이제 마리나 선착장으로 이동하려고 시동 키를 돌리자 풍악이 급작스럽게 끊겨버렸다.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국경심사 하는 주유 선착장에 있고, 마리나는 100미터 옆이다. 두 번, 세 번 시도해도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미국 국경을 넘느라 고생만 하다 집에 돌아가게 되는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