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달려온 쿠스 베이
어느새 해안에서 15마일쯤 떨어졌다. 북쪽에서 부는 바람을 뒤로 비스듬히 받으며 내려올수록 해안에서 점점 멀어졌다.
05:00시 출항했을 땐 바람이 거의 없다가 10:00시 정도가 되어서야 엔진을 꺼도 될 정도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며 조타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무겁고 느린 호라이즌스 호가 세일만으로 6-7노트까지 속도가 올라갔다. 파도 없는 날 뒷바람이 참 신비로운 것이, 주위에는 온통 양떼(깨지는 파도)들이 일어나 있으나 배 위에서 사람이 느끼는 바람은 그다지 세지 않았다. 배를 반대로 돌려 앞바람이 되는 순간 평화는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드레날린 과다분비에 시달리게 되겠지만.
세일이 홱 돌아가지 않도록 안전줄preventer을 설치하고 그나마 배가 가속을 덜 하는 방향을 간당간당 유지했다. 조타가 한 템포 늦기라도 해서 뱃머리가 살짝 바람 쪽으로 도는 순간 호라이즌스 호는 무섭게 가속했다. 미덥지 못한 오토파일럿 대신 선주와 번갈아가며 조타를 했다. 주행 방향과 조타가 손에 익자, 안정적이면서도 빠른 속도로 항해를 할 수 있었다.
지금 항해기를 쓰면서 돌아보니, 웬일로 저 때는 겁먹지 않고 태평했는지 의아하다. 호라이즌스 호는 메인세일을 줄이는 시스템이 복잡한데, 만약 바람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져서 세일을 줄여야 했다면 어리버리한 우리 둘이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게다가 조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날 뉴포트에서 좁은 배꼬리 공간에 기어들어가 확인해 보니, 조타 와이어가 느슨했고, 도르래 축도 약간 틀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새파란 바다색에, 지글지글 화창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조타대에 힘이 느껴질 때마다 긴장은 됐지만, 처음으로 선주와 나 둘이서 강한 바람에도 안정적으로 세일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취해 있었다.
이 날은 갈 길이 좀 멀기도 했다. 목적지인 쿠스 베이Coos Bay까지는 직선거리로도 80해리였다. 속도가 느리면 바 건너는 시간에 늦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바람이 센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예보에서 바람 세기보다는 파도 높이를 봐야 하는 것'이라는 가설이 맞았다는 생각에, 이제 태평양에 대한 자신감이 뿜뿜 솟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떠나기 전 뉴포트의 게스트 선착장에는 우리 말고 다른 세일링 요트 한 척이 있었다. 이 세일링 요트의 스키퍼는 뉴포트에서는 마주칠 기회가 없었지만 뒤에 다른 항구에서 다시 만나 친구가 되었다. 워싱턴주에 있던 고객의 요트를 캘리포니아로 옮기던 스키퍼였다. 우리가 뉴포트에서 출항하는 걸 보며 그 스키퍼와 어시스턴트 사이에 "저 친구들은 오늘 바람에 출항하나 봐?", "모험을 쫓아다니는 부류인가 보죠." 등의 대화가 오갔다고, 나중에 들었다.
뒷바람을 45도 정도 빗긴 각도로 항해하며 해안에서 점점 멀어지다가, 뱃머리를 90도로 꺾는 자이빙을 한 뒤에는 점점 해안에 가까워지며 내려갔다. 우리는 80해리를 내려가면서 단 한 번의 자이빙으로 쿠스 베이 바 입구까지 왔다. 해안에 가까워지니 아까부터 보이던 육지 쪽 허연 덩어리의 정체가 점점 명확해졌다. 안개였다. 이 허연 덩어리는 20:30 바 입구에 접근할 때까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등 뒤에는 낮은 저녁 해와 그 주황색 빛을 반사하는 바다가 눈이 부신데, 뱃머리 앞은 지우개로 지워 버린 듯 아무것도 없는 회색이 다가왔다.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그 회색의 안개더미 안으로 들어갔다. 바다 위 안개를 보면 피하는 게 정석이라지만 이렇게 육지 전체를 덮고 있고, 우리는 항구에 들어가야 하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머지않아 360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호라이즌스 호가 무채색 4차원의 공간에 혼자 떠 항해하는 느낌이었다. 오밤중에 바를 건너는 상황을 피하겠다는 일념 하에 전속력으로 달려왔는데 이렇게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란.. 바 채널의 경계를 표시하는 부이의 불빛도 전혀 보이지 않아, 온전히 모바일 기기의 GPS에 의존해 천천히 나아갔다.
안갯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레이더를 켜고 뿌앙이를 준비시켜 놓았다. 바다 한가운데도 아니고, 교통량이 밀집된 바 앞에서 이런 안개를 만나다니 온몸이 긴장되었다. 예방 차원에서 우선 뿌앙이를 한 번 울렸다.
뿌아아아아앙-
GPS가 가리키는 대로 바 채널을 따라 방파제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뒤쪽에서 먼 뿌아앙 소리가 울렸다.
"헉, 우리 뒤에 배 들어오나 보다. 어떡하지? 우리 엄청 느리게 가고 있는데"
이 쪽에 앞서 가고 있는 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뿌앙이를 길게 울렸다.
뿌아아아아앙-
얼마 지나지 않아 뒷 배가 다시 경적을 울렸다. 그 소리의 크기로 볼 때 아무래도 휴대용 뿌앙이 따위가 아닌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뿌앙이로 응답했다.
뿌아아아아앙-
만약 뒷 배가 대형 선박이라면 상당히 빠를 것이었다. 앞에서 길을 막고 있느니 우리도 속도를 좀 올리는 게 안전할까, 앞이 안개 때문에 아예 안 보이는데 그래도 천천히 가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안절부절. 한 사람은 긴장 속에 보이지도 않는 주위를 살피며 조타, 다른 한 사람은 우리의 생명줄 같은 충전식 뿌앙이를 자전거펌프로 열심히 충전하다 뒷 배가 경적을 울릴 때마다 응답을 했다.
뿌아아아아앙-
주거니 받거니 뿌아앙 몇 번이나 울리며 갔을까, 상대 배가 규칙적으로 안개 경적을 울린다면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응답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의심이 들 무렵. 소리가 어느새 옆에서 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위치는 대략 바 입구를 따라 서 있는 방파제 건너편 같았는데, 파도가 깨지고 수심이 낮은 저 위험한 장소에 큰 배가 서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소리는 뒷 배가 아니라 방파제 끝에서 울리는 안개 경적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성수기가 아니라 항해하는 배가 많지 않았고 그 순간 바 채널 안에 나가는 배도 들어가는 배도 없었음에 감사했다. 누군가 이 현장에 있었다면 얼마나 황당했을까? 바 입구 안개 경적에 계속 응답하며 입항하는 어리버리 세일링 요트란!
뒤따라오는 대형 선박의 허상이 사라진 뒤에도 안개 경적 뿌앙이는 아직 콕핏에 남아 있었다. 이 마리나에서는 게 잡이가 공전의 히트라, 선착장까지도 사람들이 나와 게 통발을 드리우고 있을 때가 많다고 읽었기 때문이었다. 배 댈 자리를 확보하려면 사람들을 향해 안개 경적을 울려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 이 안갯속에 게를 잡고 있는 인파는 없었다. 고맙게도 선착장에 사람 그림자가 하나 나타나더니 우리 배 계류줄을 잡아 주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로 대화가 이어졌다. 배 앞에 서서 수다를 떨던 중,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뛰어왔다.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이 개까지 셋이 배에서 같이 지낸다고 했다.
마리나 근방을 탐험하기 위해 선착장을 걸어 나오는데, 수많은 어선들 사이 범상치 않은 트리마란trimaran 한 척이 보였다. 그 친구의 배인 것 같았다. 집에서 DIY 건조한 듯한 생김새의 허름한 배 데크 위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뭔가 익숙한 이것은 필시 밴쿠버 펄스 크릭에서 자주 보던 분위기의... 배 앞에서 다른 한 사람을 마주쳤다. 하필 안개 끼고 어두운 밤의 인적 드문 선착장, 희미한 조명이 야구모자 그늘 아래의 얼굴을 비추자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두꺼비 피부처럼 수많은 작은 혹들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친절한 음성의 중년 남자는 나의 흠칫-을 보지 못했던 듯, 마리나에 이웃이 생겨 좋다며 반겨 주었다.
대체로 배가 북적이는 바다에서 항해하는 게 익숙하던 나는 다른 배 그림자조차 찾기 어려운 태평양에서 고립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무한대로 이어지는 것만 같은 수평선 위, 선주와 단 둘이 모르는 바다를 헤쳐 나가는 느낌에 압도되어 있다가 항구에 들어오면 타인의 친절한 표정에 취약한 상태가 되곤 했다. 지난번 뉴포트에 계류하던 뒷 배와 교류가 없어 매우 아쉬웠기 때문에, 오늘 줄 잡아준 친구는 밥이라도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그러나 밴쿠버 펄스 크릭 스타일이 짙게 묻어나는 배를 보고 나니 마음이 움츠려 들었다. 선주는 저녁 초대 아이디어를 듣자마자 단칼에 잘랐다.
"처음 보는 사람을 누가 식사에 초대해"
마리나에서 맘에 드는 동료 세일러를 만나 머무는 동안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이 동네 문화는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이탈리아에서는 이 '동료 세일러'들이 비슷비슷한 환경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경계 없이 쉽게 다가갈 수 있던 것이었던지 모른다. 이곳에는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배를 타는 것 같았다.
마리나에서 빠져나와 어둡고 인적 없는 동네를 걸으며 저 배는 홈리스의 배가 맞다 아니다 토론의 장이 열렸다. 약 기운 없이 멀쩡해 보이고 친절한 사람들인데 다만 배가 더럽고 병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 사람들을 홈리스라고 볼 수 있을까? 단순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홈리스라고 정의한다면 나 역시 현재 집이 없는 상태이므로 다를 것은 없었다. 게다가 차림새나 개인위생으로 기준을 바꾼다고 한들, 우리가 홈리스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어려운 상태.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가 빨래를 그렇게 강박적으로 하는 데에는 이런 심리적 배경이 있었던 것인가...
통상 이곳을 쿠스 베이 항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쿠스 베이는 이곳에서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고, 마리나는 찰스턴Charleston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 마치 서울과 인천공항 같은 관계라고나 할까.
아침에 일어나니 환한 햇볕이 배 안을 밝게 비추었다. 반가운 마음에 잠옷 바람으로 콕핏으로 나왔다. 어제의 으스스한 안갯속 항구는 간 데 없고 마치 화창한 날의 놀이공원 같은 바이브가 느껴졌다. 남녀노소 즐거운 얼굴들이 게 잡이에 열중하다가 요트 위의 사람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늘은 금요일, 불금의 선착장은 배 대신 게를 잡는 가족, 친구 연인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아침부터 바람이 꽤 있었다. 오늘이 출항날이었음 심란했겠지만, 이제 마음 놓고 여기서 며칠 쉰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았다.
뉴포트처럼 도시는 크지만 마리나가 외진 곳에 혼자 떨어져 있는 것보다, 조그맣더라도 다운타운이 마리나 근처에 있는 것이 이방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절인 배추로 김치를 담그고 고기를 삶아 보쌈을 해 먹기도 하고, 허름하지만 개성 있는 식당 겸 바를 발굴해, 쓸쓸한 강 뷰와 감각적인 모타운motown 음악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기도 하며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도착한 다음 날의 화창한 날씨는 딱 그때뿐이었다. 이 동네는 항상 흐리고 안개가 끼어 있는 곳인 것 같았다. 그러나 관광 안내소 할머니 말에 의하면, 쿠스 베이에만 가도 날이 흐리지 않다고 했다. 찰스턴이 잔뜩 찌푸렸던 어느 날, 바로 옆의 쿠스 베이에 가니 정말로 구름 한 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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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반듯이 솟은 나무들로 빽빽한 숲 속을 달려 동네 할아버지들이 연주하는 콘서트에 도착했을 때의 인상은 잊을 수 없다. 빳빳하게 다린 질 좋은 흰색 셔츠, 단정한 밀짚모자, 정성껏 관리한 오래된 악기들, 파아란 하늘, 부서질 듯 화창한 햇볕을 머리에 받으며 잔디에 널브러져 음악을 감상하던 사람들...
그러나 평화로운 휴식은 끝나가고, 점지한 출항날이 다가올수록 긴장은 높아졌다. 특히나 악명 높은 케이프 블랑코Cape Blanco와 케이프 멘도시노Cape Mendocino가 이제 멀지 않았다.
표지 사진 : 쿠스 베이 바 입구 북쪽 방파제
출처: https://www.dredging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