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내린 배가 밤새 흔들렸다. 어딘가 반복해서 문 부딛치는 소음과 무겁게 쌓인 피로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그래도 나는 몇 차례 쪽잠은 잔 것 같은데 선주는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새벽 세 시.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다음에 닻 내리고 잘 때에도 문제일 것이므로 소리 나는 곳을 찾아 원인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부엌, 화장실, 살룬, 어디에도 열려 있는 문은 없었다.
"데크인가..?"
손전등을 들고 문을 열자 차고 습한 공기에 본능적으로 몸이 웅크려들었다. 명색이 여름인데 오리털 잠바 없이는 밖에 나갈 수가 없다. 데크를 한바퀴 돌았지만 소리가 나는 곳을 찾지 못했다. 기왕 나온 김에 배추를 확인하러 뱃머리까지 나가 보았다. 어제 저녁, 선주가 김치를 담그겠다며 통배추를 줄로 묶어 바닷물에 담가 놓았다. 멀미로 몸 상태가 안 좋은 중에도 배추 절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다니, 과연 철인이었다.
철인 3종 선수가 세일링에서 빛나는 점에는 인내력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게 통발에 특화된 눈이다. 바다 수영을 하며 재빨리 부표의 위치를 확인하던 실력으로 물 위에 뜬 게 통발 부표 역시 기막히게 찾아냈다. 어제는 그 덕분에 구름 낀 하늘 어두컴컴한 바다 위의 수많은 게 통발들을 요리조리 잘 피해가며 왔다.
급작스레 출항하게 되어 목적지 틸라묵 정보는 바다에 나온 뒤에야 찾아보았다. 바 크로싱이 위험하다며 심란한 경고들이 가득이었다. 그런데 바람은 한 점 없고 엔진은 너무 느려 도착 예정 시간마저 자꾸 뒤로 밀리고 있었다. 점차 짙어지던 안개는 어느새 비로 변했고, 우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피로를 느꼈다.
맘 졸이며 틸라묵까지 갔다가 밀물 시간 못 맞춰 문 닫힌 교문 앞 지각생 신세가 되느니, 차라리 치트 키를 쓰기로 했다. 그 전날 요트클럽 할아버지가 알려준 스머글러 코브Smuggler Cove에 닻을 내리는 것.
단조로운 수직 절벽 지형의 서부 해안에 닻 내릴 정박지가 있다는 사실은, 아마 할아버지 아니었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태평양에 나온 이후 처음 내리는 닻이기도 했다. 항구에 들어가는 대신 이렇게 닻을 내리면 두 가지의 엄청난 이점이 있다.
첫번째는, 타이밍 맞추어 바를 건너 입항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도착 시간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음 날 출항 시간에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까다로운 바 크로싱을 무려 두 번이나 세이브 해 주는 것이다! 마침 요 며칠 조수 시간과 궁합이 영 안 맞았던 터라 더없이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스머글러 코브가 북서풍은 잘 막아 주었지만, 그러나, 여기는 태평양. 파도는 바람과 전혀 관계가 없는 방향에서 밀려왔다. 그에 더해, 엔진을 끄고 엔진룸을 열어보니 난리가 나 있었다. 엔진룸 안쪽을 온통 검댕이 뒤덮고 있었다. 엔진 벨트가 심하게 마모되며 나온 고무 가루 같았다. 다행히 지난번처럼 해수 튜브를 갈아 뚫진 않았지만, 엔진벨트가 닳아 얇아져 있었다. 너무 헐렁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았다.
"조류 때문이 아니었구나.. 엔진벨트가 이래서 배가 종일 느렸나봐."
엔진과 관련된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는 데에 선주와 나의 불안증이 도졌다. 벨트 교체는 정말 복잡한 일이었다. 우선 닿기도 힘든 위치에 있는 바닷물 유입구를 잠가야 했다. 그 다음 해수 튜브를 흔들고 비비고 돌리고 하며 빼 낸 후에야 그 뒤에 숨어있는 벨트를 교체할 수 있다. 그 뒤에는 다시 해수 튜브를 흔들고 비비고 돌리며 씨름을 한 뒤 풀리pulley를 온 힘으로 당겨 벨트를 팽팽하게 해야 했다. 그 어둑어둑한 저녁, 게다가 옆으로 파도 맞으며 흔들리는 배 안에서 말이다. 엔진은 선주 담당이었다.
멀미에는 철인 3종 선수도 별 수 없었다. 간신히 콕핏에 기어 올라온 선주는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걸까. 왜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걸 계속 해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 매번 이런 상황에 처하는걸까."
고달팠던 대학시절까지 넋두리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니, 선주가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웬일로 태평한 태평양
문 닫히는 소음의 출처를 찾아 해결한 뒤, 잠은 포기하고 선주와 콕핏에 나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깜빡하고 그냥 출발할 위험이 있으니 물 속의 배추도 미리 올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배추를 십자로 묶어 물에 내리고 뱃머리에 고정시켜 두었었는데, 줄을 끌어올리자, 바닷물에 절어 크기가 작아진 배추가 쏙 빠지더니 물에 풍덩 입수해 버렸다. 칠흑같은 어둠 속, 까만 바닷물을 비추는 헤드라이트 조명의 좁은 반경 안에서 흰 배추가 서서히 멀어지는데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꼭 바다에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배추와 나는 지금 가까이 있지만 다시는 서로 맞닿을 수 없는 먼 세계로 떠나가고 있는 것 같은 공포, 왠지 이 배추를 놓치면 안될 것 같았다. 어둠 속에 양동이, 후크, 줄 던지기의 난리 부르스가 지나간 후, 배추를 구조했다.
이 정도면 나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날이 밝았을 때 닻을 올렸는데, 당황스럽게도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선주가 급히 내려가 트랜스미션 오일을 추가했다. 트랜스미션 오일이 새는 고질적인 문제는 알고 있었지만, 무려 하루만에도 소진될 수가 있다는 것은 새로운 정보였다. 다음부터는 출항 전 무조건 트랜스미션 오일을 추가하기로 했다. 그래도 그 순간 바람이 없어 천만 다행이었다 생각하며 스머글러 코브를 떠났다. 출항 시간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어제의 원래 목적지였던 틸라묵 앞바다를 지나자 물 위로 불쑥불쑥 올라와 있는 기암괴석들이 장관이었다.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처럼 한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바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처럼 배로 구멍 사이를 지나가거나 기암괴석에 근접해 감상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곳에서는 안전을 위해 멀리 떨어져 가야 할 위험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마치 기름을 부어 놓은 것 같이 바다가 평평했다. 웬일로 태평한 태평양 덕에 암석 가까이 지나가며 감상할 기회를 만끽했다. 파도에 정신을 빼앗겨 주변을 감상할 여유가 없을 때가 많긴 하지만 북미 서부해안이 참 아름답긴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배 앞쪽에서 약하게 불던 바람이 점점 세지더니 방향이 점차 뒤로 돌아갔다. 드디어 세일을 펼 타이밍, 아쉽지만 오늘은 제노아만 펼 수 있었다. 마스트와 지지대 사이에 낡은 줄이 하나 끊어져 달랑거리고 있었는데, 이걸 미처 제거하지 못하고 출항했기 때문이다. 이 낡은 줄이 자칫 메인 세일 할야드에 엉키기라도 하면 세일을 못 내리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서둘러 출항하느라 미흡한 게 많았다. 이제 뉴포트에 들어가면 며칠 쉬면서 배 준비를 제대로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뉴포트
오늘 아침 출항할 때의 목적지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항구라는 디포 베이Depoe Bay였다. 하지만 점심녘부터 분 바람 덕에 예상보다 빨리 내려온 데에다 바람 굿, 파도도 굿인 흔치 않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엔진벨트도 구해야 하는데 작은 어촌보다는 도시가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았다. 피로를 인내하며 10해리쯤 더 남쪽으로 항해해 뉴포트Newport에 입항했다.
유튜브에서 이 루트로 항해하는 세일러들의 영상을 수백만 번 본 선주는 뉴포트 다리가 시야에 나타나자 적잖이 감동한 눈치였다.
"나 이 다리를 유튜브에서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몰라. 우리가 컬럼비아 강을 빠져나와 정말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는 게 이제야 실감나네."
부정탈까봐 선주도 나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호라이즌스 호가 과연 아스토리아를 벗어날 수 있을지는 항상 물음표였다. 크레인으로 배를 물에 내리는 순간까지도 곧 다시 땅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구간의 첫 기항지 뉴포트 도착을 자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를 묶자마자 한 잔 하러 밖으로 나갔다.
마리나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게스트 선착장이 굉장히 길었는데, 단 한 대의 세일링 요트를 빼면 텅 비어 있었다. 배를 대고 마리나 밖으로 나왔는데,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여긴 마리나, 주차장과 RV밖에 없고, 강 건너편에 다운타운이 있는듯 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오늘 꼭 맥주 한 잔은 해야 할 것 같아 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그런데 강 건너 다운타운까지 가는 데 무려 40분이나 걸렸다. 아무것도 없는 마리나와 걸어가기 너무 먼 다운타운, 썰렁한 게스트 선착장... 여유롭게 장시간 쉬었다 갈 곳은 뉴포트 말고 다음 기항지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예보 앱을 보니 사흘 뒤부터 파도가 높아질 것 같았다. 그동안은 무조건 바람이 적은 날 출항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이번에 깨달은 건 파도 적은 날을 고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여기 뉴포트까지 오는 동안 바람이 상당했음에도 파도가 낮으니 세일링이 재미있었다. 태평양이라도 이런 조건이라면 자신있게 항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미 서해안은 여름철에 대체로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가는 배 입장에서는 뒷바람이다. 배와 바람 방향이 같으니 실제보다 편안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반면, 지금까지의 경험을 종합해 볼 때, 고달픈 바다는 어김없이 항상 파도가 높을 때였다. 게다가 미리 겁 먹고 바람 적은 날만 골라 나갔으니 파도가 오히려 더 힘들게 되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나 싶었다.
내일 필요한 최소한의 배 준비를 마칠 수 있다면, 바람은 좀 있어도 파도가 낮은 모레 출항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다음날은 필요한 물품을 찾기 위해 종일 걸어다니며 여러 곳을 방문했다. 다리 건너 자동차 부품샵 한 군데에서 엔진벨트를 발견, 불안한 마음에 세 개 남아있는 걸 싹쓸이했다. 메인세일을 안전하고 빠르게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도 할 일 리스트에 있었다. 바람이 너무 세서 마스트에 올라 설치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뤘지만, 그림을 그려가며 고안한 시스템대로 재료는 사 두었다. 다음 항구에 요트용품 샵이 없더라도 설치할 수 있도록. 당장 메인 세일 사용에 문제가 되는 마스트 덜렁거리는 끈은 선주가 마스트에 올라 제거했다.
준비의 마지막은 역시 빨래. 항상 출항 전에 물과 연료를 채운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빨래도 해 놓아야 출항 준비가 완료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침 고래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끝없는 수평선과 분홍색 하늘빛을 반사하는 잔잔한 바다가 어설픈 3D 렌더링 영상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멍때리며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는데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물 분수 하나가 솟구쳤다.
"어.. 어?"
곧 사진으로만 보던 두 갈래 고리 꼬리가 서서히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고래였다!
시간마저 멈춘듯 조용한 태평양, 낮은 각도로 비추는 햇살, 분홍색 하늘.. 고래의 등장을 위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무대 같았다. 태어나 처음 보는 고래의 자태에 넋을 잃었다. 돌고래가 빠르고 역동적이며 친근한 느낌이라면, 고래는 느리고, 거대하고, 우아하다.
정신이 오로지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는 데에만 쏠려 있던 우리에게 바다가 자꾸, "여기 좀 봐봐" 라고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