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 전시회
"우리는 이제, 빠지노로 간다!"
[빠친코 돌리러 카지노로 가자]를 줄여 표현한 것일까. 외친 것은 기술자문역으로 함께 출장에 나선 생산공장의 L부장이었다. 그는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주먹까지 하늘로 뻗으며 소리쳤다. 전시회 첫날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상무님이 몇몇 인원들과 첫 번째 우버를 타고 막 출발한 직후였다.
"알렉스 사원님, 사원님도 돌리시나요?"
마찬가지로 웃으며 묻는 것은 디자인팀의 막내 사원 J이다. "너도 파친코 돌리러 갈 것이냐"는 소리다. 지난밤, '그래도 라스베가스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에 혼자 호텔 카지노로 내려가 룰렛 머신을 돌리다가 마찬가지로 놀러 나온 L부장에게 걸린 바가 있었는데 그새 소문이 난 모양이다.
"아니요. 전시회 응대 내용도 정리해야 할 것 같고, 좀 일찍 자려고요. 오늘 아침에도 알람 못 듣고 늦게 깨서 내일도 심히 걱정된다구요."
평생 이렇다 할 유흥을 즐겨본 적이 없는 (게다가 지난밤 카지노 첫 경험에 20불을 200불로 만들었던) 나는 오늘도 L부장과 나란히 앉아 룰렛 머신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근처에서 함께 두 번째 우버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사수 C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아, 저도 오늘 아침에 알람도 못 듣고 깼어요. 6시 반에 일어났잖아요."
옆에서 들었는지 공감하며 안심을 주는 이는 디자인팀 남자대리 T였다. 지각은 내 인생에 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것도 지구 반대편 출장 중에 지각이라는 것을 할 뻔했다. 왜 휴대폰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 순간 다른 동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는 게 괜히 위안이 되었다. 사람 마음이 참 그렇다.
"오늘까지 미국에 한 2주 넘게 계시지 않았어요? 피로가 누적되었나 보네."
디자인팀 막내도 한 마디 거든다. 이들의 출장일정은 전시회 3일과 앞뒤 출입국을 위한 5일이지만 나는 사수 C과장과 전시회를 앞두고 미리 판촉 및 홍보 차원에서 미국에 들어와 있었다. 15박 18일이라던가. 길긴 길었다.
"야, 알렉스야. 오늘은 몇 시에 볼까?"
꾸러기 L부장이 헤헤 웃으며 나를 툭 친다. 부장님, 저도 놀고만 싶습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오늘은 안된다고 튕겨본다. L 부장은 유능하고 성실한 엔지니어다. 다만, 그의 전쟁터는 충남에 있는 생산공장이었다. 나는 영업사원이다. 여기가 내 전쟁터였다. 근데 왜 눈앞에는 금화가 튀는 듯한 룰렛머신 화면이 보이고 머릿속에는 경쾌한 효과음이 울릴까.
여담) 라스베가스에서 원금 $40으로 $250까지 만들었던 나는 브레이크를 제때 밟지 못해 결국 다 잃고 떠나게 되었다. 도박으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옳다는 교훈만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