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텅 빈 노트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진척이 생겨? 그룹웨어 들어가서 검색도 해보고 유관부서 찾아가서 질문도 해보고 그러란 말야."
최근 우리 팀에 입사한 신입사원이 답답하게 굴기에 한마디 했다. 신입사원 과제로써 임원들 앞에서 진행할 PPT 발표 준비로 나름 골머리를 썩는 모양이다. 불안에 대한 답은 행동에 있다. 돈이 궁하면 벌어들일 궁리가 필요하고 성적이 걱정되면 공부를 하면 되는 것이다.
팀장님의 지시로 본의 아니게 그 프로젝트(?)의 사수로 선정된 나는 그의 무거운 손과 엉덩이가 싫다. 자기 CPU 백날 돌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빨리 외부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진위 파악을 위해 연관부서 실무자들과 대화도 해보라는 취지로 일갈했다. 일이든 학교 과제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개인의 비전이라면, 책상 앞에 앉아 골똘히 사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람은 보고서나 과제물이 아니다. 생각과 사색, 취향과 철학이 담겨야 사람으로 거듭난다. 나에게 그 시간은 특히 군 복무 중에 많이 이루어졌다.
여담: 구글에 [진로]라는 단어를 입력하고 이미지 탭을 눌렀다.
나는 Path나 Career 개념의 비주얼라이징된 자료가 궁금했는데 웬 소주병 그림만 잔뜩 뜬다.
해당 기업 임직원들에게는 중한 의미겠으나 이러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요즘과 달리 휴대폰을 쓸 수도 없었고 사이버지식방 아이디도 만들지 않았다 (군인으로 거듭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속세를 잊는 것이다). TV도 후임일 때는 선임들에게 뺏겼고, 분대장이 돼서는 후임들이 맘껏 보도록 해주고 나니 남는 것은 시간과 막사 2층 도서관에 쌓인 책들뿐이었다. 그마저도 심심하고 지루하고 때로는 초조하여 재미 삼아 책상을 펴고 침상에 앉아 이력서라는 것을 써보았다.
필자는 미국에서 학부 유학을 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장교가 되고 싶었지만 못난 아들의 학비를 마련할 시간을 벌어드려야 했기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현지 행정직원과 군 휴학의 개념을 이야기하느라 진땀 뺐다) 귀국하여 병사로 입대했다.
유학의 계기가 뚜렷한 비전을 갖고 자발적으로 택한 것이 아닌지라, 미국 대학의 학적은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이력이었다. 헌데 막상 이력서를 써보니 그마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활관에서 종이와 펜으로 일깨워진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X 됐네."
위기는 깨닫는 것이 돌파의 첫걸음이다.
난 노트를 넘기고 현재 내가 직면하고 넘어야 할 과제들을 적기 시작했다.
낮은 학점의 수직 상승, 연구중심 대학으로의 편입학, 멀쩡하고 유망한 직업, 성공적인 인생 1막 마감을 위한 기타 필요사항들...... 그 메모들은 전역 후 다년간 청사진 노릇을 했다. 물론 적은 것이 현실이 되도록 피나는 노력이 병행되었다.
나는 성공이 하고 싶다. 나를 표면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닌 아내, 가족, 친구들은 내가 자기들 주변에서 제일 야망남이라고 한다. 철이 든 이후부터 나는 늘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냥 출세하는 게 아니라 멋지고 돼먹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단순히 "성공하고 싶다"고만 정의하기보단 세속적 성취에 대한 열망과 취향을 담은 삶에 대한 로망을 블렌딩 해서 품고 산다고 해주자.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때는 빨리 그날에 닿고 싶었는데 지금은 인생이 마라톤이라는 것을 많이 받아들였다. 꿈꾸던 순간이 와도 길게 지속하려면 나는 훅이나 어퍼컷 같은 센 펀치만 연습할 것이 아니고 잽을 꾸준히 자주 치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멀쩡히 서있어야 할 체력을 길러야 한다.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던 배우 중 가장 좋아하는 로저 무어 경이 해당 배역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가 이미 40 중반이었다. 쌓아라. 분출하려면 쌓아야 한다. 스토리가 많이 담긴 인간일수록 가치가 커진다. 인생은 짧지만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걸으면 정상에 닿을 시간은 충분히 준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