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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29.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15

공원


누구나 마음 한켠에 자기만의 공원 몇 헥타르는 가지고 있어야. 



지난해 원주 토지문화관에 교환 작가로 지낸 안토니오는 메일에서 내게 '스페인 한국문화원'에 한번 가보라고 추천해줬다. 그곳에는 한국 문화와 한글에 관심이 있는 스페인 사람들도 많고 한국 책들도 있다고 덧붙이며. 안 그래도 컴퓨터 모니터로만 텍스트를 읽는 데 지친 내게 그것은 솔깃한 추천이었다. 그리고 마드리드의 레지던스에 입주한 한국 작가로서 스페인 한국문화원에 한번 찾아가 인사를 나누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스페인 한국문화원은 레지던스가 있는 그레고리오 마라뇽 역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남짓 떨어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게다가 오늘 가려는 레티로 공원 쪽 방향이라서 한국문화원에 들른 뒤 다시 걸어 레티로 공원으로 가면 딱 맞는 동선이었다. 그리하여 오전의 맑은 햇살을 받으며 운동화를 통통 튕기며 마라뇽 광장을 지나 대로를 따라(이 대로가 계속 직진하면 프라도 미술관까지 갈 수 있다는 걸 어제 알았다. 어제 이 길로 돌아왔기 때문) 마드리드를 세로로 관통해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생각해보니 어쨌거나 한국 분들이 있는 곳이니 언어의 부담이 없다는 점이 우선이었고, 한국 책이 있다는 것이 책벌레가 도서관이나 서점에 갈 때마다 느끼는 희열을 자연스레 재생시켜 준 듯했다. 나는 작가이기 이전에 어쩔 수 없는 독서광이고 독서광이었기에 작가가 되는 길을 한발 쉽게 디딜 수 있었다. 스티븐 킹 역시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독서광이라면 작가가 되는 면허증 정도는 딴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글을 쓰기 위해선 글을 읽어야 한다. 스페인에 오고 한 스무 날 정도 독서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문화원에 가서 책을 빌리면 반납일이 정해지고, 그러면 의무감에서라도 책을 읽게 될 것이 아닌가. 그것은 물론 부담 가는 의무감이 아닌 즐거운 의무감에 다름 아니다.


아름다운 대로변 공원을 가로질러 가다 보니 한국문화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자 살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국문화원에 스페인 사람만 잔뜩 있으면 어쩌지? 한국문화원에서 혹시라도 나를 알아보는 분이 있으면 어쩌지? 마드리드에 여행 온 사람이라고 그냥 책 좀 빌리겠다고 할까? 아니면 "저는 토지문화관과 스페인 문화국 주최로 마드리드 레지덴시아 데 에스튜디안테스에 교환 작가로 온 김호연이라는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라고 합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해야 할까? 벌써부터 초조해졌다. 나란 사람이 이렇게 낯을 가린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여기가 마드리드고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라 '원래' 이런 편이라는 걸 주변도 잘 모른다. 성격을 얘기할 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트리플 A형이고(실제로도 A형), 막상 말을 트면 잘도 떠들지만 속으로는 오만 가지 걱정과 염려가 내재된 상당히 심약한 인간이란 걸, 그래서 그걸 애써 감추고 나름 대범하게 구는 연습을 늘 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이미 늦은 40대 중반의 넉살 좋은 아저씨 모습이다. 다행히 한국문화원 앞에 다다를 즈음 마음속 결론을 내고 말았다. 아마도 나를 알아볼 분은 없으니 마드리드에 관광 온 한국인이고 책을 좀 빌려보려 한다고 말하기로 정했다. 혹 대여가 안 되면 소파에 앉아 읽다 가면 될 것이고.


스페인 한국문화원은 대로변 건물에 아담하게 자리해있었다. 1층은 전시장인 듯 금속공예 설치물과 조형물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고 경비인 듯 제복을 입은 스페인 여성분은 내가 들어오자 어 한국인 하나 또 왔구나, 라는 듯 간단히 스페인어 인사로 맞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들어서자 잘 생긴 스페인 총각이 역시 스페인어로 인사를 했다. 한국문화원에 한국인이 오는 것이니 당연한 루트인 듯 아무런 질문이나 제지가 없었다.


들어가자 안쪽으로 사무실과 접견실 등이 있었고 평창 동계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랑이와 곰돌이(미안. 니들 이름 까먹었어)가 양손을 쫙 펼치고 나를 반겨주었다. 올림픽도 끝났는데 너희도 마드리드까지 와서 수고가 참 많다. 그 하얗고 검은 사랑스러운 녀석들을 뒤로하고 내 진정한 관심사인 벽 한쪽을 꽉 채운 서재로 향했다. 그곳에 책이 많이 있었다. 한글로 된 책이 아주 많이 있었다.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하지만 소설 코너에서 마침내 내 책을 한 권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살짝 시무룩해졌다. 내가 출간한 네 권의 소설 중 한 권 정도는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한 게 사실이다. 연식도 인지도도 가장 높은 <망원동 브라더스> 혹은 신작 <파우스터> 둘 중 하나는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역시 없었다. 혹시 외국이라 신작이 아직 세팅되지 않은 걸까? 그래서 <파우스터>가 아직은 소개되지 않은 걸 거야...라고 생각할 즈음 정유정 작가님과 조남주 작가님의 신작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님들의 위엄이란! 그리고 스페인까지 내 책이 오려면 내가 직접 들고 오는 수밖에 없겠군, 이라는 안타까운 결론을 내려야 했다.


스페인 한국문화원의 돈키호테 1, 2권



그럼에도 다시 기분이 좋아진 것은 돈키호테 완역본 1,2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짐의 무게를 줄이고자 노트북에 담아온 <돈키호테>는 사실 웹소설 돈키호테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적응이 잘 되지 않았는데... 이곳에 <돈키호테> 완역본 1,2권이 있다! 그것도 민용태 역자님 버전이다. 한국에서 여름에 읽은 것은 안영옥 역자님 버전이었고 다른 역자님 버전도 읽고 싶었는데... 역시 안성맞춤이다. 나는 곧바로 돈키호테 1,2권을 빼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대여섯 명의 한국 직원 분들이 한국인임이 분명한 한 아저씨의 출현에 눈길을 돌렸다. “저 이거 대출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정면에 자리한 남자 직원분이 일어나며 외쳤다. 


“김정... 아니 김호연 작가님 아니세요?”


이분이 외친 '김정...' 은 내 본명의 앞 두 글자다. 역시 공무원답게 나를 본명으로 인지하고, 이후 필명을 언급한 뒤 작가라는 호칭으로 내 정체를 정확히 묘사한 그분은, 스페인 한국문화원 문화행사 담당 나예원 실무관이었다. 아름다운 이름의 건장한 남자분인 이분은, 나를 보자마자 알아봐 주시더니 안 그래도 마드리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내가 놀라자 그는 스페인 문화국 문예 담당자 Ainhoa sanchez를 통해 한국 작가 한 명이 마드리드 레지던스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마침 나를 컨택해보려 했다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헐. Ainhoa sanchez(아인오아 싼체쓰)는 스페인 문화국 직원으로 이 교환 작가 프로그램의 스페인 쪽 담당자다. 나 역시 이곳에 오기 전 그녀에게 몇 가지 문의를 이메일로 교환한 적이 있었고, 마드리드 도착 후 한번 자리를 가지기로 한 상태였다.


아무튼 나예원 실무관의 센스와 환대에 놀라며, 나를 먼저 알아봐 준 것에 어깨가 슬쩍 으쓱하며, 그의 안내에 따라 도서 대출증을 발급받았다. 도서 대출증을 발급해 준 2층 입구의 잘생긴 스페인 청년은 내가 작가라는 사실에 잠시 뒤 혹시 스페인에 출간된 작품이 있는지를 물었다. 안타깝게도 없다는 말에 그가 괜찮다며 돌아갔다. 나중에 들으니 그 청년은 스페인 문학잡지의 직원이기도 해서 나에 대해 취재나 인터뷰를 생각했던 것이란다. 역시 어서 돈키호테에 대해 써야 스페인어로 된 내 책이 나오고 저 총각과 인터뷰도 할 텐데... 이렇게 다시 한번 집필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다니... 과연 모든 것이 배움이자 압박이었다.


대출증을 만들자 돈키호테 1,2권을 빌리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것은 문화원에서 잠시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웠다! 이따 레티로 공원에서 한가히 산책을 하기에 이 책의 무게는 심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의지 약한 중년의 사내는 곧바로 돈키호테 책을 포기하고 대신 움베르트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빌렸다. 이 책은 한 이십 년 전에 출판사 이벤트 책으로 제공된 소형 문고본으로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도 오래됐고 돌아가신 에코 옹도 반갑고, 무엇보다 웃으며 화내고 싶어 지는 놈들이 주변에 늘어난지라 다시 읽고 싶어 졌다. 나는 일단 이 책으로 워밍업을 하고 다음번에 돈키호테 1,2권을 빌리겠다 마음먹었다.


책을 빌리고 이제 돌아가려는데 나예원 실무관은 시간이 괜찮으시면 원장님을 잠시 뵙는 건 어떠시냐 했다. 원장님이라면 스페인 한국문화원 원장님? 원장님까지 뵙고 간다니 이거 예상 밖인 걸, 외국이지만 동방예의지국 문화원인데 그럼 그럼 인사를 드려야지. 나는 흔쾌히 응했고 잠시 뒤 이종률 원장님이 나오셨다. 스페인에서 오래 근무하신 원장님은 작가라는 내 정체성을 엄청 존중해주시며, 이곳에 오게 된 걸 환영하고 함께 할 문화적 활동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열린 제안에 나도 문화원과 함께 스페인 분들이건 한국 교포 분들이건 같이 만나는 자리에 언제든지 참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짧은 대화 속에서 뭉클했던 건 지금 스페인에 온 외로운 한국 소설가를 반겨주고 함께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 그것이 당연히 이분들의 일이라고 자처해준 것이다. 익명의 인사나 하고 가려던 나의 소심함을 완전히 깨버리는 호탕한 원장님과 실무관의 환대에 진한 소주 한잔과 시원한 김치찌개의 기운이 진동하는 듯했다.


한국문화원을 나오자 마드리드의 햇살 쨍쨍한 거리가 다시 내 앞에 펼쳐졌다. 마포갈비에서 나와 2차로 타파스 바에 들른 기분이었다. 반갑고 구수한 우리네 사람들의 기운이 내게 힘을 주었고 이제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으로 다시 들어갈 때였다. 나는 걸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따라 계속 내려갔다. 그렇게 15분 정도 걷자 커다란 녹색 쉼터가 내 앞에 바다와 같이 펼쳐졌다. 레티로 공원이었다. 나는 공원으로 빨려가듯 들어갔다.



Jardines del Buen Retiro



레티로 공원. 정말 좋다. 여의도 공원을 온통 숲으로 채우면 이 정도가 될까? ‘마드리드의 허파’라는 말이 적절하게 도심 한복판에서 쉼터로, 개와 함께 하는 산책로로, 놀이터로, 운동 장소로,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를 편안하게 받아주는 곳이다. 그런데 참으로 방대한 공간인지라 하루에 이곳을 다 돌아보기는 무리가 있었다. 하자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공원은 무리하는 곳도 섭렵하는 곳도 아니다. 나는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레티로 공원에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오늘은 공원의 동쪽 일부를 걷고, 다음 주엔 공원의 서쪽 일부를, 그다음엔 중앙 어딘가를, 그렇게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나이가 들수록 눈이 나빠지고 그럴수록 녹음을 많이 봐야 한다고 들었다. 토지문화관에서 산과 숲을 수시로 바라보며 좋아졌던 눈이 다시 침침해지던 찰나, 레티로 공원에 들러 숲과 나무를 마음껏 바라보자 각막이 씻은 듯 상쾌해졌다(의학적으로 밝혀진 건 없습니다).


하릴없이 걷다 벤치에 앉았다. 제대로 갖춰 입고 러닝을 하는 마드리드 사람들,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개들, 흥미롭게 두리번대며 다니는 다양한 나라의 관광객들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이곳에 온 본전을 뽑은 기분이다. 그런데 공원 입장료도 없고, 걸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사실 본전이고 뭣도 없다. 슬며시 걸어와 심신의 휴식을 취하고 나무와 사람과 개 구경도 실컷 하는, 정말이지 혜자로운 공간이 레티로 공원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가? 이런 크고 멋진 공원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한강이 있다. 한강은 정말 자랑할 만하다. 그리고 산이 있다. 시내 한 복판에 우뚝 솟은 산이 몇 개냐? 남산, 북악산, 인왕산, 북한산... 아무튼 우리는 우리대로 도시와 조화롭게 자리 잡은 자연이 있다. 마드리드에는 레티로 공원이 있다. 이곳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일상의 짐을 진 자들이 쉬면 된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와서 제대로 쉴 것이다.


지난 일주일 간 파란만장했다. 마드리드 3대 미술관 중 두 군데를 다녀왔고, 세르반테스 길과 집에 다다랐고 동상과도 마주했다. 한국문화원도 방문했고 꼭 와보고 싶던 레티로 공원에 와 휴식도 취했다. 이제 만반의 준비가 된 듯했다. 돈키호테를 찾아 나설 시간, 돈키호테처럼 갑옷을 입고 늙은 말에 올라탈 시간 말이다.


Jardines del Buen Retiro,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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