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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Mar 02.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16

말라가


말라게타 해변에 몸을 담가야 하는 세 가지 이유에 대하여   



나는 지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해안도시 말라가에 와 있다. 왜죠?


스페인에 오기 전 지중해 바다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지중해를 끼고 세계로 나간 스페인이 아닌가. 마드리드는 내륙에 있다지만 이 동네 KTX격인 국립 철도청 renfe(렌페)의 'AVE(아베)'를 타면 스페인의 해안 도시들에 두 시간 안짝으로 도달할 수 있다. AVE가 극동아시아에서는 영 쓸모없는 이름이지만 여기서는 꽤나 멋진 기차의 이름이다. 아무튼 이 기차를 타면 지중해 도시 어디를 가도 서울-부산보다 가깝기에, 나는 마드리드에 자리를 잡고 나면 스페인의 지중해 도시에 한번 다녀오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스페인의 KTX, AVE가 날렵한 주둥이를 자랑하며 출발 대기 중



그렇다. 마드리드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돈키호테에 대해 쓸 준비가 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중해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열망을 이룰 준비가 된 것이기도 했다. 또한 AVE를 예약하고 AVE가 다니는 Atocha(아토차) 역에도 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스페인의 지중해 도시 중 어디가 좋을지도 추천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러자 지중해에 몸을 담그는 상상에 내 몸이 늘 붕붕 떠 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말라가에 오게 된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로 어느덧 9월 중순에 접어든 날씨. 태양의 나라 스페인도 일교차는 심했다. 오후의 햇살은 여전히 눈깔을 빠져버리게 할 만큼 강렬했지만 아침저녁으론 바람막이를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서늘해졌다. 만약 마드리드 옆에 바다가 있다면 바야흐로 입수는 꿈도 못 꿀 시즌이 된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남부는 아직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을 터. 역시 그곳 해변들은 여전히 몸을 담글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알아본 곳이 바로 이 곳 말라가의 말라게타 해변이다. 그야말로 적격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 말라게타 해변의 시푸드 음식점에서 맛없는 해물 요리를 먹으며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이유와 나머지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일단은 굽다 만 정어리 구이를 마저 해치워야 한다. 이 시푸드 음식점은 구글 평점이 부진했지만 바다가 보인다는 점에서 일단 앉아야 했다. 그리고 생선을 직접 구워준다는 것도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구글 평점은 진리이기 때문에 결국 음식 맛으로는 실망 중이지만 지중해만큼은 잘 보이니 자릿값만으로도 버티고 있을 만하긴 하다.


말라가는 휴양지였다. 마드리드에서의 생활이 익어가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진짜 여행다운 여행이었고 휴양이었다. 어제 이맘때 마드리드 아토차 역으로 가서 기차를 기다리고, 탑승 후 선잠을 자다 옆 자리 스페인 할머니들의 수다에 깨고, 말라가 여행 정보를 검색하다 한국에 태풍이 온다는 뉴스도 접하고, 챙겨 온 샌드위치를 김밥 먹듯 까먹고 다시 졸다 보니 도착한 그곳, 여행지. 마드리드가 스페인에서의 첫 거처라면 말라가는 스페인에서의 첫 여행지다.


여행의 열기가 후끈대는 말라가 중앙역 (feat : KIA TAXI)



말라가 중앙 역을 나서니 바다내음이 물씬 풍겨온 건 거짓말이고 갈매기가 끼룩 댄 건 사실이다. 역 광장을 장악하는 깡패 비둘기들을 몰아낸 조폭 갈매기들이 위세를 부리듯 끼룩끼룩 대고 있었고, 나는 부산역에서 남포동으로 걸어가는 기분으로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기온은 확실히 마드리드보다 덥고 무엇보다 바다에 인접해 습한 공기가 몸을 감싸니 이것이야말로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환경과 타이밍이 아닌가! 하며 만족스런 기분이 들었다. 마드리드는 덥지만 건조하고 그 더위도 점점 가을의 서늘함으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덥고 습하다. 그래 봐야 한국의 여름 염천 더위와 습기를 이길 순 없으니 내 몸을 감싸는 이 열기는 참으로 적당한, 기분 좋게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날씨였다.


숙소에 들어와 짐을 풀고 나는 말라가의 맹주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 이곳에 온 최초의 목적은 지중해에 몸을 담그기 위한 것이지만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만큼 말라가를 상징하는 인물에게 인사를 하고 도시의 풍광을 익히는 것이 기본이 아닌가. 살아생전 바르셀로나 파리 등 유럽의 핫한 도시를 오가며 지낸 그라지만 탄생하고 어린 시절 자란 곳, 즉 그의 고향이 바로 말라가다. 그의 이름은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크리스피니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 줄여서 '파블로 피카소' 이 위대한 20세기 천재화가의 고향에 온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숙소에서 나와 그의 미술관으로 향했다.


다음 주에 마드리드 3대 미술관 투어 중 마지막 남은 곳인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가야 한다. 그곳엔 피카소의 작품 중 가장 보고 싶은 '게르니카'가 있다. 나는 끝판왕 게르니카를 목격하기 전에 말라가의 피카소 미술관에 먼저 와 보고 싶었다. 살면서 총 세 군데 피카소 미술관에 다녀왔다. 바르셀로나와 파리, 그리고 일본 하코네의 피카소 미술관이 그곳인데, 이 왕성한 창작욕의 대가가 생산해낸 작품들은 보고 또 봐도 흥미롭고 감탄이 나올 따름이다. 내게 네 번째 피카소 미술관이 될 말라가의 이곳 역시 그의 고향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기대막급이다.


museo PICCASSO Malaga



관람을 마쳤다. 기대보다 별로였다. 왜죠? 피카소의 초기작들과 훌륭한 데생 습작, 그의 흔적과 잔재들 모두 좋았지만 생각보다 소박한 미술관이었고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관람이 편하지도 않았다. 그의 몇몇 조소 작품들과 미술관의 깔끔한 중앙 정원 구조는 마음에 들었다. 마치 피카소가 말년에 이곳에서 살았을 법한 모던하고 세련된 공간이었다. 아무튼 워낙 피카소의 걸작들에 대한 감상이 쌓여서인지 생각보다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한 것이다. 그저 피카소의 고향 박물관을 방문한 것에 뿌듯함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생가에는 들르지 않았다. 이곳만으로도 피카소가 이곳에 거했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런데 피카소 미술관을 나온 나는 식사를 하러 가던 중 극장 하나를 발견하고 입이 떡 벌어진다. ‘세르반테스 극장’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을 보며 갑자기 마드리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세르반테스 옹 동상이 떠올랐다. "이 산초를 닮은 동방의 소설가 놈아,  돈키호테에 대해 쓴다더니 대체 어디로 도망가 쏘다니고 있느냐!"라고 그가 질책하는 듯했다. 세르반테스 극장이라니... 역시 스페인은 이 노인네 손바닥이란 말인가? 게다가 세르반테스 극장 앞으로 '세르베자 세르반테스'(호프집), '메종 데 세르반테스'(식당), '어쩌고 저쩌고 세르반테스'(암튼 먹는 데) 등이 널려있었다. 약간의 부담감을 느낀 나는 원래 가려던 식당을 제치고 메종 데 세르반테스에서 메뉴 델 디아를 먹음으로써 노인네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어야 했다.


무려 TEATRO CERVANTES. 세르반테스 극장!


말라가에서도 나를 무한 압박 중인 '세르반테스 투성이'



그리고 아랍 유적의 전망대로 갔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마치 북악 스카이웨이 오르듯 버스를 타고 가자 나타난 곳. 이곳은 과거 아랍의 요새로 말라가가 무어인들에게 장악되어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성곽과 전망대였다. 꼬불꼬불한 성곽과 그 안의 정원은 아름다웠고 그라나다의 알함브라와 헤네랄리페의 소규모 버전이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말라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대성당과 관광지가 어우러진 거리와 그 너머의 주거지역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항만의 도크와 크레인이 계속되다가 말라게타 해변이 넓고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평화롭고 잔잔한 청색 바다가 무한대의 가을 하늘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바다 앞에는 둥그런 원형 경기장이 옹골차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축구장이라 여겼다가 다시 자세히 보니 투우장이었다. 바다 앞 투우장. 이곳의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주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해변가 투우장. 저 아파트에서는 공짜 투우를 볼 수 있을 듯.



숙소로 돌아와 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에 대성당을 둘러본 나는 드디어 말라게타 해변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덜 익은 정어리 구이를 먹으며 지난 1박 2일의 말라가 생활을 회상하고 있는 중이다. 이곳에 와 있는 동안 계속 빨래가 ‘말라가’고 술잔이 ‘말라가’는 걸 목격하며 아재 개그에 대한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용케 참았다. 장하다. 정리하자. 말라가는 지중해에 닿아있는 스페인 남부 지역의 해안  도시다. 그리고 내가 마드리드에서 지내며 처음으로 여행을 온 도시이고 이제 바다에 몸을 담그겠다.


20대 중반 어느 한 철을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부츠’에서 자원봉사자로 지낸 적이 있다. 첫 해외 생활이었고 이후로 수없이 외국을 다니며 나만의 여정을 갖게 된 것도 다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주었다. 1999년 세기말, 이스라엘 최북단 나하리아 해변에 누워 청록색의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복학이고 취업이고 삶의 방편이고 다 파도의 포말처럼 흩어지고 나와 바다와 하늘만이 남고 말았다. 그 특별한 바다가 지중해고 특별한 만큼 내게 많은 것을 주었고 또 잃어버리게 한 바다가 지중해였다. 랭보가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건 적당히 취해 해변에 누워있는 거라고. 그때는 그 말을 신봉했고 그렇게 했다. 이제 취해 해변에 눕지도 바다에 뛰어들지도 않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바다의 짠맛을 맛볼 따름이다.


말라가 말라게타 해변, 20년 만에 나는 지중해 바다에 다시 몸을 담갔다. 짜고 좋았다. 이곳에 온 세 번째 목적과 오래된 약속이 한꺼번에 달성되었다. 나는 오래지 않아 해변을 나섰다.

지중해. 말라게타 해변. 말라가. 안달루시아.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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