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의 책임과 권리.
우리는 이번 도쿄올림픽을 치르면서 운동선수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경쟁에서 성과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배웠다. 선수는 더 이상 국가의 부흥을 위한 선전용으로 쓰이지 않으며 그럴 이유도 없다. 그렇다. 대한민국 스포츠는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체육계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대를 역행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으며, 지난 2020년 트라이애슬론 최숙현 선수의 죽음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대한민국 엘리트 체육의 어두운 면을 보고야 말았다.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데에는 지도자들의 역량과 윤리적 검증이 부실했다는 데에 있다. 인격적으로 파탄난 지도자에서부터 실력 검증도 안된 의무 트레이너까지 도대체 어떠한 기준으로 지도자의 자격이 부여되는 걸까? 돌이킬 수 없이 불이 번진 뒤에도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것은 바로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폭행에 가담은 물론 은폐한 동료 선수의 거짓증언들은 더욱 충격 적이었다.
감독과 선수들이 합당해서 자신들이 저지른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할 수밖에 없던 것은 어떻게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지도자 밑에서 자라난 선수들은 그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수는 지도자가 코칭에 대한 열의나 제자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지도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코치는 코치대로 권리가 무너지고 선수 또한 선수로써의 책임보다는 권리만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책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권리는 뷔페 놀이 마냥 자기 입맛에 맞게끔 조정된다. 고로 선수의 성과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리만 탐하는 지도자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선수의 권리가 높아지는 것이 지도자의 권리를 뺏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역량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선수든 코치든 책임이 권리보다 클 때 신뢰가 쌓인다.
경력이 다가 아니다. 하다못해 토익점수의 유통기한도 2년이며 학계에서도 교수를 임용할 때 최근 5년간의 실적만을 인정하는 이유는 그 이전에 면접자의 경력이 얼마나 화려했든 간에 지금 실무에 적합한지를 보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 보다 스포츠는 더욱 냉정하다. 엘리트 선수에게 2년 전의 성과는 아무 효력이 없으며 지금 당장 얼마나 세계무대에서 통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양궁 대표팀도 이번 도쿄올림픽이 연기되면서 일정에 없던 대표 선발전을 다시 치러야 했다. 그로 인해 기존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보장받았던 선수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경쟁해야만 했다. 만약 코로나로 인해 올림픽이 연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김제덕 선수의 파이팅 넘치는 기백과 금메달을 구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올림픽이 연기되고 난 뒤 다시 치룬 올림픽 선발전에서 선발되었다).
이렇듯 선수들은 매년 수많은 대회를 통해 자신의 기량을 검증하는 데 반해 엘리트 스포츠에서 지도자들을 향한 검증은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리더는 조직의 수장이 될 자격이 없다. 사실. 같은 실수라는 말 자체가 웃기지 않나. 실수는 원래 한 번만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