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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지 않기 위해

by 김민영


평생을 둘째로 살아온 나는 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익숙했다. 누군가를 이끌기보다 지시를 받고 따르는 편이 더 편했으니까. 그것은 재능일 수도, 타고난 성향일 수도, 오랜 학습의 결과일 수도 있었다.


나와 MBTI가 같다던 직장 선배는 이상하리만치 이끄는 데 서툴러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능숙하게 사람들을 이끌어갔다. 나는 그 모습이 신기했다. 알고 보니 그는 세 형제 중 첫째였다. 철부지 동생들을 챙기며 자라온 시간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리라.


사람들 중에는 타고난 성향대로 살아가는 이가 있고, 운명을 거스르며 다른 길을 만드는 이가 있다. 혹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살아가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에 속할까. 우유부단하고 강단 없는 나는 운명을 거스르는 쪽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AI 시대를 맞아, 고객들의 AI 대응 전략을 컨설팅하는 업무가 부쩍 늘어났다. 늘 수동적으로만 살아온 내가, 무언가 기획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 어색했다. 그것은 애초에 간절히 바라온 일이 아니었다. 다만 먹고살기 위해,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끌려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면, 정작 스스로의 삶을 이끄는 데에는 서툴러지기 마련이다. 잠시 방심하면 저 멀리 떠내려가기 쉬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나로 살아가야 했으므로, 어렵고 불편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다. 눈물이 날 만큼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유난히 마음이 급하던 어느 날, 버스는 계속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불안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찰나, 빨간불은 금세 초록불로 바뀌었다. 그때 깨달았다. 모든 고통과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따금 빨간불이 앞길을 막아도, 지난한 삶이 발목을 잡아도, 결국 다시 초록불은 켜진다는 것을. 영원히 멈춰서는 이에게 신호등이 필요가 있겠는가. 신호등은 달리는 것들을 위한 존재였다.


물론 쉬어가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바다를 보러 갈 것이다. 탁 트인 수평선, 그러나 가끔은 쓰레기도 떠밀려오는 바다.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으면 유유히 항해하는 배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흔들림 없이 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음을 안다.


삶도 그렇다. 멈춤과 흔들림이 있어도, 결국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신호등은, 바다는, 그 위의 배는 모두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살아가기 위해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모든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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