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by 김민영


누구나 저마다의 삶만큼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먼 길을 돌아 긴 땅의 끝에 다다라서야 지난 삶의 여정을 털어놓았다. 동네의 온갖 식당들이 연휴와 늦은 시간을 이유로 문을 닫아,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한 안주거리와 술을 곁들인 뒤로 벌어진 일이었다. 아주 사소하고 미시적인 삶의 태도, 바로 그 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당신의 불같은 성격이 못내 두려웠다. 실은 미웠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한평생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당신의 감정이 소용칠 때,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던 불씨가 튀어 오를 때 나는 꼭 살갗이 타들어가는 듯 아팠다고.


당신은 그제야 당신 삶의 역사를 털어놓는다. 인정할 수 없던 상처, 망각해 왔던 통각을 실로 오랜만에 마주했을 때 당신은 조금은 무너지는 것도 같았다. 다 이해한다고 말하였으나 실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가보지도 않은 길을 어찌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 그뿐이었다.


도저히 맨 정신엔 말을 할 수 없어서 맥주를 한 캔씩 더해갔다. 술기운에 올라 도저히 해서는 안될 말을 하는 것도 같았다. 점점 자아와 세상을 구분 지어 놓은 어떤 벽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술에 취해 솔직해질수록, 지난날을 직시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건 우리 자신이었다. 무너지는 건 알량한 허울과 무의미한 외벽이었다.


누구나 저마다의 삶만큼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오늘로부터 내일로 나아가는 것은,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마찰을 수반하는 일이었으므로. 더욱이 나의 걸음은 보폭만큼의 전진을 장담해주지 않았다. 세상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존재들로부터 결정되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뜻하지 않은 충돌과 좌절 속에서 이따금 무너질 때가 있었다. 다시 일어서면 좋았으련만, 누구에게나 그만큼의 의지와 여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 역시 ‘운’이라는 어떤 영역 속에 머물러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내 세상을 창조하고 지탱하였으나 때로는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의지와는 관계없는 일이었으므로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 불합리한 의존과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아나보고 반항도 해보았으나,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탄생한 이후로 끊임없이 대물림되어 온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부터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아팠으나 당신 역시 아팠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무수한 상처의 흉터로 만들어진 것이 당신의 역사라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의 세상이 전부이던 날들엔 작은 불씨가 모든 것을 태워버릴까 두려울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와 당신과 무수한 나와 당신이 만들어 온 것들이 비로소 하나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불은 그 무엇도 태울 수 없었다. 단지 이따금 어떤 고리는 분을 못 이기고 끝내 삭아 무너질 때가 있을 뿐이었다.


술기운이 절정에 달했을 때, 나는 원망 대신 당부의 말을 건넸다. 모든 대화는 이 말을 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나의 당부를 듣고 당신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고 당부에 대한 약속 대신 또 다른 말과 말로 얼버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당신이 끝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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