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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영


아무 말도 써지지 않았다 수십 픽셀 짜리의 글자들로 화면 속을 가득 메울 모든 것이 의미없게 느껴져서


주식이 호황이라는 사실, 너무 뒤늦게 알아챈 탓인지 (늘 그렇듯) 남들이 돈을 버는 동안 나는 고점에 물려 잃기 바빴다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 또 나에게만 어렵지


수십 시간을 일하고 끝내 쓰러진 사람들 무너진 굴뚝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 누구를 살게 하기 위함이었을까 우리는 늘 통제받고 지배받고 계층 속에 신음했다 무엇이 올바르지? 무엇이 정당한 것이지? 묻고 또 묻지만 끝내 그런 건 다 없다는 걸


더 좋은 성과를 내야했고 또 다른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친절한 선배가 되기도 해야했다 더 나이가 들면 다양한 역할 속에 놓인다는 말, 그러니 지금을 즐기라는 말, 알면서도 지레 겁먹게 되던 말, 이것조차 각자의 역할 속에 잘 짜여진 각본 같이 느껴져 꽤나 우습기도 하다


나는 나로서 해야하는 말이 있다 나였기 때문에 그러나 내게 주어진 역할도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은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 이따금씩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자유는 아니라는 사실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저 기죽지 않을게 의기소침하지도 않을게 고개를 쳐들고 떳떳한 척 살아볼게 대단한 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지만 그냥 그런 척 살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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