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영 Apr 08. 2020

[이어즈&이어즈] 급변하는 세계, 그리고 민주주의

※스포일러 주의



임기가 끝나가는 트럼프가 중국의 인공섬 훙샤다오에 핵미사일을 발사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수많은 난민들이 유럽 국가들로 몰려오고, 각국은 넘쳐나는 난민들에 곤혹스러워한다. 세계 경제는 다시 한번 거대한 공황을 마주하고 은행들은 줄도산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극우정당 정치인은 거대 양당을 제치고 정권을 잡기 시작한다···

영국 드라마 '이어즈&이어즈' (사진 = 왓챠)



 바로 드라마 [이어즈&이어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2020년부터 2034년까지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향후 15년 간 세계의 미래가 어떻게 진행될지 보여준다. 그것도 꽤나 비관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어즈&이어즈는 단순히 미래들을 나열하는 전시영상에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는 급변하는 미래의 사건들에 평범한 등장인물들의 삶을 매끄럽게 녹여낸다. 주택 관리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대니얼은 근무지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난민 빅토르와 사랑에 빠지고, 스티븐의 딸 배서니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 정신이 데이터화 된 ‘트랜스 휴먼’이 되고자 한다. 금융가인 스티븐은 세계적 금융위기로 은행이 파산하며 일자리를 잃게 되고, 정치 활동가인 이디스는 핵미사일이 떨어지는 인공섬 홍샤다오의 모습을 눈 앞에서 지켜보다 방사능에 피폭되고 만다. 사회의 변화 속에 덩달아 급변했던 그들의 삶을 치열하게 극복해 나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드라마는 긴장감 있게 다루고 있다.



물론 실제 우리가 마주하게 될 미래가 드라마 속 미래와 정확하게 일치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그려내는 미래가 오늘날의 현실을 꽤나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다. 드라마 속 가상의 섬 ‘훙샤다오’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남중국해에서 팽창을 노리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간의 현실 속 갈등을 그 배경에 두고 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역시 몇 년간 지속되고 있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사태의 연장선 상에 있는 등 드라마는 미래의 모습을 오늘날 현실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이처럼 현실에 기반한 미래에 대해 꽤 흥미로운 통찰력을 제시한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고, 또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닌가 싶다.

   


민주주의의 위기

  


민주주의는 그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여겨져 왔다. 적어도 인권과 정치적 자유, 그리고 관용과 포용이 최우선 가치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생기게 만드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브렉시트의 현실화, 이른바 ‘대안 우파’를 표방한 극우정당의 등장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고 가장 우려스럽게도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시리아 사태 등으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난민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된 각종 사회문제들을 겪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극우 세력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드라마 속 '비비안 룩'의 모습은 꼭 이들을 연상케 한다. 다른 세계의 문제엔 관심 끄고, 내가 사는 동네의 문제나 잘 해결해 달라는 그녀의 말. 그 말 한마디에 지친 사람들은 열광한다. 이윽고 '우리 사회'만을 위해서 추방되는 난민들, 점점 통제되는 정보 속에서도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그녀를 지지하고 만다.

       


도구화된 민주주의에는 미래가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 근본엔 어떤 가치가 숨어있는가?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힘써왔는가? 특정 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혹은 그릇된 가치관에 기반을 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쟁취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다양한 목소리를 포용하고, 상호 비난이 아닌 합리적인 비판과 토론 그리고 경쟁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도모하는 정치 체제이다. 시민들의 목소리가 배제되었고, 많은 소수자들이 권력자의 잘못된 정치적 의도에 의해 희생되어 온 그동안의 역사에서 시민들은 누구 하나 차별받지 않아야 하며, 권력은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당당히 외쳐왔다. 프랑스혁명, 19세기와 20세기에 꾸준하게 전개된 여성 참정권 운동, 그리고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한국의 80년대 민주화운동들이 바로 그러한 외침들이었다.

    

거세지는 유럽의 극우화 (사진 = 연합뉴스)


그러나 그랬던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사람들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차별을 외치고 있다. 명확하지 않은 기준으로 자신과 타자를 가르고, 오로지 ‘나’만이 잘 살기 위해 타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국적, 인종, 종교, 성별, 난민, 성적 지향성 등으로 차별하고 공격한다. 합리적인 비판과 토론은 찾아볼 수 없다. 상대방을 향한 거친 말 한마디, 비방으로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바쁘다.



그러나 진정 모든 사회 문제를 사회의 특정 계층, 혹은 자신과 반대되는 생각과 신념을 가진 자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지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없다. 경제 위기, 난민 문제, 문화 간 충돌, 젠더 갈등과 같은 많은 사회 문제는 사회, 경제, 종교, 역사적으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구조적인 문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어느 한 집단을 배척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이러한 사회의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파악하고 차근차근 해결하려는 노력 대신, 오로지 외부의 적을 찾아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돌리려고 하는 특정 정치인들의 태도는 자신의 책무를 저버리는 기만이자 직무유기다. 세상의 문제들은 단순히 난민을 내쫓고, 상대 진영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며 환호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가져다 올 후폭풍과 비극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저 내 입맛에 맞는 말이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도 쉽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 같아 보여서 좋아할 뿐이다.

    

드라마 속 비비안 룩의 등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복잡해진 국제 정세, 그리고 어려운 국내 사정 속 비비안 룩은 ‘영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큰 지지를 얻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가치관, 정책에 숨겨진 진실, 정치적 행보에는 관심도 없다. 정치인들의 달콤한 말 한마디에 지지를, 그리고 표를 던질 뿐이다. 결과는? 그녀에게 반대하는 시민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고, 무고한 난민들이 수용소에서 서서히 병들어가고 말았다.



드라마 속 지나친 과장일 뿐일까? 합리적인 비판과 논쟁이 사라진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을 '우리'가 아닌 '그'들이 빼앗고 만다. 세상에 존재하는 '비비안 룩'과 같은 자들은 자신의 욕망과 권력을 위해 민주주의를 도구와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갈등을 조장해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을 선택하는 것을 합리적인 것인 마냥 속이는 태도. 1930년대 파시즘도, 냉전 시대 수많은 독재정권들도 모두 이런 식으로 뿌리를 내려갔다. 민주주의가 관심받지 못할 때, 괴물들은 그것을 악용해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리는 드라마에도 등장하는 딥 페이크 기술, 가짜 뉴스 그리고 유튜브를 위시한 검증되지 않은 정보의 범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대중의 정치적 판단력이 큰 도전을 맞고 있는 것이다. 왜곡된 정보가 꾸준히 대중을 현혹시키고, 그릇된 판단을 유도하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끊임없이 비판하고, 바라보고, 의심해야 한다. 맹목적인 비난 혹은 지지, 그리고 편 가르기도 없어야 한다. 함부로 속지 않는 대중 앞에선 제 아무리 고도화된 기술이 등장한다 한들 절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세상, 미래는 어떻게 나아가게 될까?그리고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중요한 갈림길에 [이어즈&이어즈]는 우리 앞에 나타나 경종을 울리고 있다. 미래는 결코 힘을 가진 소수에게만 달린 것이 아니라고. 결국 더 좋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모두의 관심과 힘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에피소드 6에서 무리엘 할머니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앉아서 종일 남 탓을 해. 경제 탓을 하고 유럽 탓을 하고 야당 탓을 하고 날씨 탓을 하며 광대한 역사의 흐름을 탓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핑계를 대지. 우린 너무 무기력하고 작고 보잘것없다고 말이야. 그래도 우리 잘못이지. 우리가 이 지경으로 만든 거야.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작가의 이전글 '동맹국' 미국의 거센 압박을 바라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