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골 0 어시 1 따봉
대중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한 국가대표 축구 선수가 경기 중에 동료에게 잘했다는 의미로 엄지척을 했는데, 그 선수가 경기 중에 한 일이라고는 '0 골 0 어시(스트) 1 따봉'이었다는 놀림을 받으면서, 오래전에 오렌지 주스 광고에 등장하면서 유행했던 '따봉'이 다시 소환된 적이 있다. 1989년도에 델몬트 오렌지 주스 광고로 인하여 따봉이라는 단어가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위고하를 따지지 않고, 장소 불문하고 엄지척과 함께 따봉을 외치곤 했다.
아래 광고가 대한민국 따봉의 출발점이다.
스토리 라인은 최고 품질의 오렌지를 찾아서 브라질로 날아간 담당자가 최고라는 뜻에서 따봉을 외치면 현지인들이 기뻐서 춤을 추고 난리다. 그 당시에는 인공감미료로 맛을 낸 혼합음료가 주류였고, 상대적으로 비싼 백 퍼센트 오렌지 주스는 병원 매점에서 박스 포장으로 판매하여 문병을 갈 때 들고 가는 귀하신 몸이었다. 그래서 가족이나 지인의 병실에 갔다가 오렌지 알이 씹히는 캔 하나를 얻어 마신 날은 로또 2등 정도를 맞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오 예~ 따봉!
따봉?
포르투갈어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포르투갈 친구들이지만 스칠 때마다 나에게 외친다. 따봉? 또는 Todo bem? 따봉은 원래 Está bem/Está bom에서 왔는데, 브라질을 포함한 포르투갈어 사용자들은 앞 'es' 부분의 발음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tá bem/tá bom의 형태로 들린다. 따봉?이라고 외친 포르투갈 친구는 '오케이?' 정도로 나에게 안부를 물은 것이고... Todo bem? 은 그야말로 All right?이다. 그때마다, 나는 고도로 훈련된 한국인의 자동반응으로 잽싸게 엄지척으로 되돌려 준다. 하여튼, 광고 덕분에 따봉은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아는 포르투갈어가 되겠다.
백 퍼센트 오렌지 주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서론이 길었다. 따봉 때문에.
'백 퍼센트 오렌지 주스'라는 광고를 처음 들었던 따봉의 시절에는 현실 세계에서 오렌지를 생과일로 만나기가 어려웠고, 원재료를 가공하고 부풀려서 생산 판매를 하는 것이 상식인 시절이라 소비자의 관심을 끌려는 과대광고쯤으로 여겼다. 한 번씩 병원 입원이라는 타인의 불행을 배경으로 은혜를 입어 마셔보는 것이 전부인 때라 그것이 백 프로이건 오십 프로이건 상관이 없었고, 당연히 100% 일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떻게 과일즙 100%로 주스를 만들겠어?
그러한 의심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세월이 흘렀고 더 이상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유리병이나 투명한 플라스틱 병에 들어 있는 더욱 신선해 보이는 과일 음료수를 선택한 뒤로는 캔이나 팩으로 만든 과일주스는 더 이상 손대지 않았으니까.
어라, 이게 현실이야?
포르투갈 알가브에는 길 옆으로 오렌지 농장이 보인다. 야~ 오렌지다. 한 때 부모님께서 관상용으로 키우던 화분에 한 두 개 앙증맞고 힘들게 달려있던 오렌지를 본 것이 전부인 나에게 큰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들을 목격하는 것은 첫 경험이었다. 그래서 감동했다.
파로(Faro, 알가브주의 중심 도시) 시내에 나왔다. 어라, 오렌지 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채로. 익어서 바닥에 떨어진 오렌지도 보인다. 야, 이게 현실이야? 무심하게 걸어가는 동네 사람들 사이로 동양인 하나가 신기한 듯이 가로수 사진을 연신 찍어댄다.
야, 뭐 이런 게 있어?
동네 슈퍼에 가면 신선한 오렌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오렌지 더미 옆에는 다른 세상에서는 보기가 힘든 요상한 기계가 떡하니 서 있다. 짐작하시겠지만 오렌지에서 직접 주스를 추출하는 장치 되시겠다.
위 바구니에 오렌지를 올려두면 옆쪽 통로를 통해서 질서 정연하게 내려온다.
철망 통로를 따라서 도착하면, 오렌지는 플라스틱 롤러의 파인 홈에서 양쪽으로 꼼짝 못 하게 가두어진 채 단두대처럼 칼이 나와서 반으로 쓱 갈라진다.
두 쪽으로 잘린 오렌지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 오렌지의 노란색 영혼은 아래로 흘러서 인간들의 미각을 구제하기 위해서 투명 용기에 다소곳이 담긴다.
심오한 과학적인 원리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니 아래 영상을 보시면 이해하시리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거나, 호기심이 많아서 꼭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직접 주스를 만들어 보시라. 1리터 한 병을 만드는데 대충 10-12개의 엄청난 수의 오렌지가 들어갔다.
너는 이제 구원을 받았노라
나는 이제 믿는다. 100% 오렌지 주스가 있다는 것을. 한 모금 마시면 오렌지의 영혼을 통해서 새로운 맛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그분이 오시리라. 그리고, TV 요리 프로그램에서 맛을 볼 때 머리 위로 터지는 CG처럼 뇌 속에서 불꽃이 튀리라. "어떻게 과일이 이렇게 달 수가 있지?" "야, 진짜 맛있다." 당신도 지금부터는 기꺼이 오렌지교의 성도가 될 것이다.
게다가, 500 ml 한 병이 1.79 유로, 1리터가 2.99 유로다. 오늘자 환율로 2,315원과 3,880원이다. 그대를 구원할 Sumo Laranja 꼭 기억하시라. 포르투갈어로 'Sumo'는 일본식 씨름의 '스모'가 아니라 '주스'를, 'Laranja'는 '오렌지'를 말한다.
오렌지여 영원하라!
시계처럼 움직이는 신선 오렌지 주스 착즙기는 영국 작가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 1917-1993)의 디스토피아적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당연히 외국 관광객들의 최고 인기 아이템이다. 나는 마실 때마다 '따봉!', '따따봉!', 아니, '트리플 따봉!'을 날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대항해시대를 떠나기 전에 알가브에서 꼭 직접 짠 오렌지 주스를 마시기 바란다. 아니 어떻게 과일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새로운 자각과 함께 오래전 어린 시절에 해야만 했을 질문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믿을 수 없고 확인할 수 없지만 실재하는 것이 있다는 달콤한 체험은 그대의 뇌 속에 조직된 합리성을 녹이고 부존재의 존재를 믿는 경지로 이끄리라. 그것이 대항해 시대로의 출발점이다.
오렌지여 영원하라! 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