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이면, 헝클어진 머리와 부스스한 얼굴로 무릎이 튀어나온 헐렁한 내복을 입은 채 우리 삼 남매는 흑백 테레비 (그때까지는 TV나 텔레비전으로 진화하기 전이다) 앞에 모여있곤 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께서 분주히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고, 딱지와 구슬치기가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새나라의 어린이들에게 일요일 아침은 일주일 동안의 기다림이라는 수표를 기쁨이라는 현금으로 환전하는 시간이었다. 그 날을 놓치면 다시는 찾을 수 없는.
'뽀빠이'는 당시에 방영된 어린이 만화 중의 하나였다.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시금치 통조림을 원샷으로 먹고 생기는 초인적인 힘으로 악당을 물리치던 늘 입에 파이프를 문 선원이 뽀빠이였다. 지나치게 팔다리가 가늘고 큰 눈을 가진 날씬 빠꼼한 연인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올리브'다. 원래 미국식 이름은 올리브 오일(Olive Oyl)이었는데, 당시 영어가 낯선 우리나라에서는 간단히 올리브.
블루토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짐작 가능한 스토리 라인으로, 예쁜 올리브를 짝사랑한 터프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블루토(Bluto)다. 뽀빠이와 앙숙관계였던 블루토는 틈만 나면 올리브를 납치해서 연인으로 삼으려고 했고, 그때마다 올리브가 외친 유명한 말이 "구해줘요 뽀빠이"다. 수많은 패러디가 나온 '구해줘요 뽀빠이'라는 말이 떨어지면 어디에선가 뽀빠이가 나타나고, 시금치 통조림만 먹으면 엄청난 힘이 생겨서 거대한 덩치의 블루토를 물리치고 사랑하는 연인 올리브를 구출해 내곤 했다.
뽀빠이는 이후에 많은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에 나타나는 '부르면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 음성인식 지니의 원조인셈이다.
나도 시금치 먹고 뽀빠이처럼 될래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이 만화 시리즈 덕분에 슈퍼 울트라 파워가 생성되는 시금치를 먹는 아이들이 증가하였고, 미국의 경우에는 이 만화 시리즈의 인기 덕분에 당시 시금치 소비량이 33%나 늘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의도된 시금치 광고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성공적인 PPL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 어린이 만화로 방영을 한다면, 엄청난 악플과 사회적 문제가 될 이슈들로(뽀빠이는 늘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고(어린이 만화에서), 비정상적으로 가냘픈 올리브는 다이어트와 관련하여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편견을 가지게 할 수 있고, 틈만 나면 납치를 감행하는 블루토는 스토킹과 납치 등의 범법 행위들로 ) 가득한데 그 당시에는 전국의 새나라의 어린이들이 보고 자랐다. 그러고 보니 사회문화적 인식과 관용의 범위가 참 많이 변했다. 이런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분들은 채우지 못한 그 간극 때문에 최근에 여러 가지 곤란을 겪고 계신다. 만화에서는 권선징악적인 요소를 강조하다 보니 해당 요소들이 과장되었다고 생각된다.
올리브 오일(Olive Oyl)
올리브의 성은 Oyl(오일)인데, 원작자가 의도적으로 올리브를 합성하여 '올리브 오일'로 재치 있게 작명하였다. 하여튼, 식물 '올리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올리브를 만난 것은 뽀빠이라는 미국 만화영화를 통해서였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올리브'가 식물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거나, '올리브 오일'이라는 식용 기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단지, 올리브는 뽀빠이의 연인이었을 뿐.
올리브 오일 생산국에 포르투갈도 넣어줘요!
뽀빠이의 괴력이 시금치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현실과 허구를 구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올리브가 나무의 이름임을 알게 되었고, 그 나무로부터 기름이 나온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정보를 단순 암기하고 먼 나라에 있는 나무 이야기로 여기고 오랫동안 살았다. 어느 듯 외국 피자 브랜드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작고 동그랗게 잘린 아무 맛도 나지 않았던 검은색 토핑이 내가 조우한 최초의 올리브 열매였다.
우리 식탁에 스파게티와 파스타가 한 끼의 식사로 오를 때, 올리브 오일은 어머니께서 재래시장에서 손수 짜주신 빈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병 옆에 외국 브랜드를 두르고 위풍당당하게 서있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필요할 때 아껴서 사용해야 할 귀하신 몸이었다.
포르투갈에서는 동네 슈퍼에도 다양한 올리브 관련 상품들이 즐비하고, 식당에 가면 절인 올리브 열매가 밑반찬으로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올리브와 올리브 오일은 주로 이탈리아 요리에 곁들이고, 올리브유 최대 생산국인 스페인산 상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보니 포르투갈에서도 질 높은 올리브유가 생산된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올리브 나무가 정원수나 가로수로 사용되는 포르투갈도 양질의 올리브와 올리브유 생산국이다. 이 땅에 살다보니 스페인과 프랑스로 둘러싸인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인 포르투갈은 억울하다. 품질 좋은 포도주가 있고, 올리브를 생산하는 소수의 국가 중 하나임에도 존재감이 모호하다. 과거의 영광에 비해서 허약해진 국력 때문이라고 탓을 돌려 본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올리브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투박하게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