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변을 마주한 그날은 무척이나 심란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나 보다.' 위암이 대장암으로 전이가 되어 혈변을 보고서야 병원으로 달려갔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며 몸 돌보기를 돌같이 한 미련한 선배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던 시절이다. 게다가, 집사람이 위암 치료를 위한 화학요법의 후유증으로 머리칼이 다 빠진 뒤 작은 솜털 같은 머리카락이 자라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걱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마음이 무척이나 착잡했었다. 허망하게 떠나간 선배의 대충 견디며 살아내는 미련함을 되풀이하지는 않아야겠다는 자각으로 당장 지역 병원의 담당 의사에게 상담을 신청했다.
피 빛 빨간색을 찾아라
상담 당일 아침에 혈변의 핏빛을 정확하게 서술하기 위해 적절한 영어 단어를 생각해 보았으나 나의 빈약한 영어 어휘 목록 속에서 마음에 드는 표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단순히 '붉은' 또는 '빨간'으로 서술하기는 아쉬움이 있었고, '선홍빛'을 떠 올리고는 그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 'scalet'을 찾아내었지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Sacalett O'Hara) 역을 맡은 비비안 리의 눈부신 미모가 떠올라서 혈변이 더 이상 처연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패쓰!
붉은색의 정도에 따라 '발그스럼, 볼그스럼, 불그스럼, 빨그스럼' 등등에다가 '-댕댕', '-그래', '-족족'을 붙여서 무한대의 스팩트럼을 뽑아내던 한국어 표현의 자유로움을 영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언어적 표현을 포기하고 색상을 직접 보여주기로 하였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으로 뒤져서 스마트폰으로 '요정도' 이러면서 손가락으로 콕 집어서 보여줄 수가 있겠지만 스마트폰 이전의 시절이고, 또 색상표가 들어있는 책이나 자료를 갖기에는 너무 먼 전공인지라 적절한 색상 자료를 찾기가 난감했다.
(요즘은 이런 칼라 차트를 찾아서 콕 집으면 그만인데....)
책은 위대하다
그래서, 집에서 혈변과 가장 유사한 색상을 뒤지다가 발견한 것이 집사람 친구가 고맙게 매달 보내주고 있는 좋은 생각 잡지의 표지였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붉은 색상이 강렬한 예쁜 꽃 사진이었던 것 같다. 좋은 생각을 옆구리에 끼고 당당하게 진찰실로 입장하여 좋은 생각을 들이밀며 "요런 색깔의 혈변이 나왔어." 환자보다 더 환자같이 얼굴이 희고 야윈 의사는, 밝히기 민망한 몇 가지 검진을 한 후에, 죽기가 더 빠른 오랜 대기 기간으로 악명 높은 국가 의료 시스템을 예외적으로 통과시켜서 대장 내시경 일정을 긴급으로 잡아 주었다.
아마, 책 표지를 가득 채운 선홍색 꽃들이 의사의 시각 세포를 자극하고 뇌에서 심각성이 증폭되어 이런 파격적인 조치를 가능하게 하였으리라. 또 아름다운 꽃 사진을 들이밀며 더러운 혈변을 고해하는 불쌍한 아시아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측은한 마음이 발동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상담을 성공으로 이끈 최고의 선택은 좋은 생각 표지였다. 역시 책은 항상 위대하다!
대장 내시경의 결과
그래서, 대장 내시경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결과는 '아직 건강하게 이 글을 쓰고 있음'이다. 관장약을 통해 똥꼬가 헐 만큼 '내가 너무 많이 먹고살았구나'라는 비워냄의 깨달음을 얻은 다음 날에 무사히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 나의 대장은 맛집으로 소문난 어느 곱창 전문점의 곱창만큼이나 깨끗했다. 고등학교 이후로 갖고 있었던 대장에 대한 막연한 걱정을 걷어내는 기회가 되었다. 변비로 고생한 오랜 세월만큼이나 숙변 제거 광고에 나오는 혐오스러운 찌꺼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굴곡을 따라서 용종이 종유동굴처럼 늘어서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그런 막연한 걱정 말이다.
한국인의 힘은 두 개의 도시락에서 나온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대학의 프로젝트는 여유 있게 마치는 법이 없다. 프로젝트의 마감 기일은 다가오고, 끝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결론은 완료될 때까지 밤샘 작업이었다. 그때마다, 다른 외국 녀석들은 기력을 잃고 하나 둘 나가떨어졌다. 나는 마지막까지 견뎠다. 내가 끝까지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학창 시절에 두 개의 도시락과 이른 아침 보충 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으로 다져진 맷집과 멘털 덕분이다.
두 개의 도시락
중학교 때까지는 점심용 검은색 보온 도시락과 저녁용 알루미늄 도시락이었고, 고등학교부터는 사각 알루미늄 도시락 두 개를 갖고서 학교에 갔다. 중학생 시절에 두 개의 따뜻한 보온 도시락을 갖고 다니지 왜 한 개의 보온 도시락과 한 개의 알루미늄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냐 하면, 일단 그 당시 보온 도시락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아서 점심시간까지는 온기가 겨우 유지된 반면, 저녁 자율학습 시작 전에 먹는 저녁 식사 시간 때가 되면 보온 도시락도 차가웠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었다.
등에 매는 배낭은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고, 방학 중에 잠시 해외 연수를 다녀오신 영어 선생님이 한 두 달 외국물을 먹었다고 폼나게 몇 개월 들고 다닐 때 볼 수 있는 희귀 아이템이었다. 오직 학교에서 정한 검은색 책가방을 팔에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책가방을 왼손에 들고, 그 옆에 보온 도시락을 하나 정도는 같이 잡아서 들 수 있어도 두 개를 들고 다닌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배달의 민족이라고 해도 어려웠다. 오른손은 선배나 선생님께 거수경례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항상 비워 두어야 했다. 설사 등 뒤로 메는 배낭형 가방이 있다고 해도 당시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중고등학생에게는 교칙 위반이었을 뿐이었다. 겨우 대학생이 되어서야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다닐 수 있었다. 한쪽 어깨에 걸친 배낭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얻을 수 있는 특권이고 낭만이었다.
요놈이 그 보온 도시락인데 왼손에 책가방과 함께 두 개는 들고 다니기가 불가능하다.
사내자식이 말이야
고등학교 때부터는 보온 도시락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보온 도시락은 여고생 전용처럼 여겨서 '남자다움'이 강요되어 있었던 군사정권 시대의 인식의 틀 속에서 남자 고등학교에서는 정서적으로 금기시되는 물품이 되었다. '집에 있는 보온도시락을 들고 가서 학교에서 따뜻하게 밥을 먹으면 좋지 않으냐?'는 어머니의 권고에도 펄쩍 뛰면서 3년 내내 두 개의 양은 사각 도시락을 책 사이에 세워서 가지고 다녔다. 사각 반찬통을 그 아래에 깔고.
학교 급식은 용어도 없었던 시절이고, 학교 매점이 있었지만 미리 끓여놓은 면에 뜨거운 라면 수프 국물을 담아주는 것이 유일한 음식 메뉴라 매력도 없었다. 또, 한꺼번에 몰린 학생들 사이에 줄 서 있다가 라면도 못 먹고 한 시간의 식사시간이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씩 라면이 당겨서 한 번 먹어볼라치면 수업 종료 종이 울리자마자 매번 올림픽 신기록 정도의 속도로 달려야 된다. 운이 나쁘게 매점에서 가장 먼 교실에 배정을 받을 경우에는 당연히 그 해는 라면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두 개의 양은 사각 도시락은 가장 현실적이고 안전한 선택이었다.
물당번
번호순으로 돌아가며 한 주일씩 담당하던 주번이 큰 양은 주전자에 담아 오는 뜨거운 물을 도시락에 부어서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거의 한나절이 지난 차가운 도시락이었다. 간혹 난로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도시락이 정감 있는 교실 풍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쪼금 현대화가 진행된 도시 학교라 중앙난방으로 난로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낭만이나 데워먹는 호사를 누리지도 못하였다. 뒤집으면 4각으로 각이 잡힌 밥이 한 덩이로 떨어지는 차가운 도시락이 매일매일의 현실이었다.
어쩌다 변비?
먹는 것이 그 정도 취급을 당했으니 배설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전혀 고려사항이 될 수가 없었다. 규칙적인 배변 습관이니 그런 것은 없었다. 신호가 오면 갔고, 그 신호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몰랐고, 수업 중이나 등하교 버스 안에서 신호가 와서 곤란을 당하지만 않으면 되는, 가능하면 안 가면 좋을, 살아가는데 전혀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언젠가부터 좌측 아랫배에 통증이 왔고, 때로는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왔고, 손으로 좌측 아랫배를 만지면 둥근 원형의 내장이 손에 잡히곤 했다. 그래서, 주변에 물으니 '변비'라고 했다. 변비가 있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어느 날 약국에서 변비약이라는 것을 사주셨다. 그래서 한 알을 먹어 보았더니 거의 출산의 고통을 경험할 뻔했다. 그 후로 좌측 하복부에 변이 가로지르는 무게감을 느낄 때마다 한 알씩 먹었다. 그리고, 또 출산, 출산, 출산.
아빠, 어디가?
세월이 흐른 뒤에 긴장되고 흥분되고 심장 뛰는 조건이 되면 장에서 다급한 신호가 왔다. 당장에 달려가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것 같은 그런 긴박한 신호가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나타났다. 조언을 구하니 과민성 대장 증상이란다. 그래서, 나는 성깔이 예민한 제멋대로의 대장을 가진 황당한 인간이 되었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다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황급히 도로 옆 수로로 달려가는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도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에서 내려 급하게 어딘가로 가는 아빠를 본 아들이 궁금해서 물었다. "아빠, 어디가?" 그 아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불특정 한 저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황급히 사라지곤 했다.
변비를 부탁해
올리브 나무는 햇살이 쨍하고 건조한 여름을 견딜 수 있게 잎이 작고 단단하여 강수량이 적은 남부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의 지중해 지역에서 재배된다. 우리나라에는 올리브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이탈리아 음식과 곁들이는 것이고, 주로 스페인산 올리브유 브랜드가 알려져 있다 보니 포르투갈에서도 질 높은 올리브유가 생산된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올리브 나무가 정원수나 가로수로 사용되는 포르투갈에서는 올리브유 생산 국가답게 동네 슈퍼에도 올리브유 코너가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올리브 열매를 다양한 형태와 숙성 정도로 나누고 보관하여 먹기도 하지만, 올리브 열매를 짜서 올리브유 형태로 가정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낯선 가정용 5리터 대용량 패키지도 있다.
원산지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신선한 올리브유를 구할 수 있으니, 이 번 기회에 변비에 좋다는 올리브유를 한 번 먹어보기로 했다. '올리브, 변비를 부탁해'라고 기대하면서.